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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4

<광개토대왕>광개토호태왕비의 비밀 광개토호태왕비의 비밀 광개토호태왕비의 비밀 호태왕비는 광개토호태열제의 사후 2년 만인 서기 414년에 그의 아들 장수열제가 세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금석문의 기록은 당대에 쓰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후세에 쓰인 사서보다 정확성이 높다고 본다. 호태왕비문도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는 정확성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 비문에 보면 광개토호태왕은 시조로부터 17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태왕은 고주몽으로부터 따지면 왕위로는 19대 왕이요, 혈통으로 따지면 13세손이 된다. 그런데 어째서 호태왕비에서는 17세손이라고 하였을까? 호태왕비가 발견되고 그것을 해독한 이후로 누구도 풀지 못하였던 이 미스터리가 『환단고기』를 통하여 풀렸다. 『환단고기』에서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단군으로 등극한 후 해모수.. 2019. 6. 18.
<고두막한>동명성왕 고주몽 동명성왕 고주몽 동명성왕 고주몽 고주몽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성왕 혹은 동명제라고 칭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런 설명이 없다. 왜 그런 칭호를 얻었는지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역사 왜곡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동명제는 원래 고두막한이다. 그가 스스로 ‘동명東明’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고두막한은 졸본 땅에 부여를 세운 다음 졸본부여라고 했고, 동명부여라고도 했다. 그래서 동명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부르게 되었는가? 좁게 보면 고두막한만이 동명왕이 되는 것이지만 넓게 본다면 고두막한을 이은 고무서 단군, 또 그 뒤를 이은 고주몽도 동명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모두 동명부여의 왕이기 때문이.. 2019. 6. 18.
<김부식>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연도를 서기전 37년이라고 한 이유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연도를 서기전 37년이라고 한 이유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연도를 서기전 37년이라고 한 이유 고주몽이 북부여의 단군이 된 이때가 서기전 58년이다. 서기전 79년생이므로 이때의 나이는 『삼국사기』에서 말한 대로 22세가 된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지 정복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를 창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북부여(졸본부여)의 단군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고구려의 시조라고 하는가? 북부여의 단군으로 다물多勿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22년을 지내 오다가 서기전 37년에 이르러 연호를 평락平樂으로 바꾸면서 나라 이름도 해모수의 고향이었던 고구려로 바꾸었다. 이로부터 고구려의 시조가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때를 고구려의 건국으로 본 것이지만 고주몽으.. 2019. 6. 18.
<고구려>고주몽의 혈통 고주몽의 혈통 고주몽의 혈통 해모수의 장자인 모수리는 북부여의 2대 단군이 되었고, 그의 동생 고진高辰은 고리군의 군왕(稾離郡王)으로 봉작을 받았다. 북부여의 제후인 셈이다. 고진의 손자 불리지弗離支(일명 고모수高慕漱)가 있었는데 이 불리지가 바로 하백의 딸 유화와 사통한 주인공으로 고주몽의 아버지이다. 그러니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라 고손자高孫子가 된다. 고주몽이 태어난 해는 서기전 79년 임인년壬寅年이고 생일은 5월 5일이다. 이것이 『환단고기』가 밝혀 주고 있는 고주몽의 혈통과 탄생에 관한 비밀이다. 불리지는 요절하였기 때문에 미혼모 유화는 어린 고주몽을 안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동부여의 해부루 왕에게 찾아갔다. 해부루는 혈통으로 보자면 고주몽의 7촌 아저씨였으므로 흔쾌히 고주몽과 유화를 .. 2019.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