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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잊혀진 역사

<단군조선>식민사학자 이병도를 회개시킨 최태영박사

by 이세덕 2017. 8. 18.

<단군조선>식민사학자 이병도를 회개시킨 최태영박사

<단군조선>식민사학자 이병도를 회개시킨 최태영박사

 

"식민사학자 이병도를 회개시킨 최태영박사"
올곧이 역사를 관통한 학자의 일생
스스로 강사가 돼 학도병 권유 연설피해
70세 상고사 연구시작, 100세 때 책발간  
 

최태영박사

 

개교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인 최초의 법학 정교수이자 본교의 첫 한국인 정교수였던 최태영 박사를 만났다. 1900년생인 최 박사는 현재는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었지만 병실안에 가지런히 놓인 책들과 박사의 온화한 말씀은 올곧은 학자의 일생(一生)을 웅변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기자를 맞은 최박사는 보성전문학교의 정교수가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최 박사는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영미법을 배워오라는 부친의 말씀에 따라 1918년 메이지(明治)대 법학부 예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법학과 영어·철학 등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할 당시에는 교수로 임명받을 자격을 가진 조선인 유학생은 그 밖에 없었다. 귀국 한 뒤 일제하 경성법전의 교수직을 마다하고 바로 보성전문 법과의 정교수가 됐다. 최박사가 정교수가 될 때까지 보성전문의 교수들은 모두 일본인 이었다. 최 박사는 보전에서 한국 최초로 ‘뉴욕 유가증권법’을 강의하는 등 상법·민법·행정법 등을 가르쳤다.
최박사는 보성전문의 교수시절 경신학교의 교장을 겸하면서 혹독한 일제하에서도 배일(排日)의 자세를 견지했다. 최박사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며 일제치하를 회고했다. 일제하 모든 학교들은 사사건건 일본인의 간섭을 받아야 했지만, 최박사는 신사참배를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피치못해 가야 할 때는 일본인을 대신 내세웠다.

 

또한 당시 전임강사 이상은 학도병연설을 해야 된다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학도병 연설을 피하기위해 아무도 몰래 정교수직에서 강사직으로 내려앉았다. 그래서, 학도병 연설 요구에 비켜설 수 있었다. 하지만 학도병에 끌려가는 제자들이 생기면 직접 찾아가 실탄사격 방법과 청나라 말(淸語)을 몰래 가르쳐주었다. 최전선 접전지대에 배치될 때 기회를 엿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많은 제자들이 만주 중국군 부대로 탈출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바로 그 학생들이 몇 해 전까지는 최박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1945년에 총독부에서 ‘일어 상용 촉진회의’ 가 있었을 때 다른 조선인 교장들이 일본어 상용에 찬성했을 때 최 박사는 총독부 고관들이 있는 공개석상에서 일본어 상용을 공식 반대했다. 이로 인해 죽음의 위협을 맞았지만, 그 며칠 후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져 조선은 광복을 맞이했다. 최 박사는 이 때를 회상하며, “원자탄이 나를 살렸다. 사실 나는 피하기 선수다”라며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보이며 소년처럼 웃으신다.

 

최박사는 보성전문 시절을 돌아보며, 일제 강점기간 중에도 인촌 김성수 선생과의 밀약으로 최초의 대학학술지인 보전논집(普傳論集)을 한글로 발표한 일을 중요한 성과로 꼽았다.
해방이후 최 박사는 부산대 인문대학장, 서울대 법대학장, 청주대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최박사는 정년퇴직 후 한국 상고사 연구에 몰두해 단군조선의 실체를 밝히고, <삼국유사>에서 환국(桓國)이 환인(桓因)으로 변조된 것을 증명하며 <한국상고사>(1990),<인간 단군을 찾아서>(2000),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2002)를 발간했다. 이 같은 성과는 건국이후 고시에 국사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집어넣기를 주장하면서, 당시 한국 역사가 일본의 식민사관 그대로임을 발견할 때부터 시작된다. 최 박사는 정인보의 ‘조선사연구’부터 다시 읽으며 역사연구에 들어간 것이다.

 

쉽지 않은 말씀 끝에 본교생에게 한마디 말씀을 부탁드린다는 기자의 청(請)에 “ 고려대학교 100주년을 축하합니다. 학생들은 한국역사의 위기가 많은 이 때에 남에게 속지 말고 바른 역사의식을 갖길 바란다”며 고대와 자신의 깊은 인연을 강조하신다.
몸이 불편한 가운데 아직도 밤에 수 시간씩 책을 읽고, 지난 4월 1일자 학술원통신에 글을 기고하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한 학자의 꼿꼿한 자세를 지키고 있는 최태영 박사. 최근에 찾는 이들이 드물다는 병원 관계자의 말에 괜시리 부끄런 생각이 기자의 마음에 일었다. 오는 6일(금)은 음력 3월 28일로 최박사의 연치(年齒)가 106세가 되는 날이다.
최 박사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자평한다. “구원산 밑의 조그만 애가 시방 백살이 넘었다. 영감이 악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벼슬은 절대로 않고 살면서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법학과 단군에 관한 책도 몇 권 남겼다.”

 

개교 100주년이 되는 이 때, 고대의 방명(芳名)을 누군가에게 고마워한다면 최 박사의 학자정신을 결코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인사를 깊이하고 병실 문을 나설 때 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옷깃이 저절로 여며졌다.
 
2005년 05월 02일
출처 : 고대신문
최태영 박사님 저서

 

■ 식민사학자 이병도를 회개시킨 최태영박사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의 수서관보가 되어 ‘조선사 편찬’이라는 거대한 역사왜곡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 문교부 장관까지 지냈다. 그는 『조선사』 편집에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직접 기여하였고, 일제가 유포시킨 식민사관을 해방 후까지 이어주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국사학계에는 직접간접으로 이병도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물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요지의 이른바 반도사관론을 대량 유포시켰으며, 우리 역사 사료들을 전부 빼앗아가고 불태우고서는 증거가 있어야만 인정한다는 식의 소위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병도는 나중에 고대사 연구에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고 스스로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병도는 죽기 직전,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발표한다. 그간 최태영 박사, 송지영 KBS 이사장, 국문학자 이희승 박사 등의 설득으로 과거 자신의 역사관을 크게 수정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논설을 게재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어떤 이는 ‘노망 드셨네’ 하며 비웃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때 그와 더불어 『한국상고사입문』(1989년)을 발간했던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이면 누구나 어린아이 때부터 배웠던 ‘동몽선습’이나 ‘세종실록’ 등 각 고전에도 단군기록이 나옵니다. 수백년전 기록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기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판소리할 때도 그 긴 내용을 한자도 바꾸지 않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기록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서울대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 2000년 1월3일자 문화일보 특별대담) 

[한국상고사]
오랫동안 우리 상고사 복원과 정립에 전념하여 온 최태영 옹의 역저.
저자는 이에 앞서 한국학연구회의 국사 강좌를 마치고 그 교재를 모아『한국 상고사 입문』을 펴냈는데, 그 책은 우리 국사 날조의 원흉이었던 이병도가 마침내 개심을 하여 최태영 옹과 함께 펴낸 책이었다. 그 뒤 상고사에 대해 누구나 쉽게 접근할 기회를 마련해달라는 요구에 의해 펴낸 것이 이 책이다. 내용은 주로 단군조선 시대의 개국과 발전, 국가체계, 기자 위만 조선의 왜곡의 실상, 그리고 고조선의 열국시대를 정리하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민족의 뿌리인 상고사를 바르게 인식해야 된다’는 저자의 간절한 염원을 마음속에 담으며 책장을 펼쳐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