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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잊혀진 역사

<보천교>보천교 독립운동사 증언 (차경석 성도님 아들 차용남)

by 이세덕 2017. 9. 20.


<보천교>보천교 독립운동사 증언 (차경석 성도님 아들 차용남)

<보천교>보천교 독립운동사 증언 (차경석 성도님 아들 차용남)

차경석은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신흥종교 보천교를 창건했다. 그리하여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고 일제의 탄압도 따랐다.


보천교에 대해 묻자, 용남(차경석 성도님의 아들 차용남)은 신중하면서 긴장하는 듯 했다. 그리고 용남의 달변과 조리있는 대답은 이러했다.

 

"왜정 때, 자기(총독부)들이 발표한 것이 육백만입니다. 그때 우리나라 동포를 천 팔백만 인구라고 했지요.

 


교종이라고 교에서 종을 지은 것이 있어요. 종각이 있어서 삼시로 종을 치고 그랬는데, 그 종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컸어요. 그런데 경주 봉덕종이 크고, 서울 보신각에 종이 더 크다고 하지만은, 보천교 종은 우리나라 제일 큰 종인데,


저 산이 가리고 있는 순창 동곡면에서도 지붕 이올라고 집우 위에 올라가면 낮 오시에 치는 종소리가 들리고, 청명할 때는 이리에서도 들렸다고 그랬습니다.


지금 있으면 우리나라 국보가 될 것인데, 왜놈이 일일이 쪼개가지고 그런데.. 교인들이 숟가락, 밥그릇 하나씩 내가지고, 교인 하나 앞에 보통 수저 한 벌씩, 밥그릇 하나씩 내서 종을 지었거든, 그래서 쇠 수입한 것 보고서 왜놈들이 신도수를 발표했단 말이야."


일제의 탄압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다.


"왜놈 압박을 받아 나왔지, 아버지(차경석 성도님) 돌아가실 때까지 이 방에 계셨으니까. 육백만 대중 교세가 그렇게 흥하여도, 이 집에서 거처하셨으니까. 뭐 하나 칠한 것도 없고, 사치 하나 한 것도 없고

 

지금도 아버지 입던 옷이 있지만은, 옛날에 여름에는 마포 모시옷, 겨울에는 그저 미명옷이라고 있었소 가정에서 모두 짜서, 무명옷 입고 명주옷 그 이상은 안 입으셨고 그리고 왜놈 물건 일체 사용 안했었거든.


꼭 토산 장려만 했었고 그래서 왜놈은 피하고, 아버지도 객지에서 칠년간 피해서 다녔었지만은.


보천교인은 방주(方主:포교 책임자) 밑에 육임(六任: 포교 책임 직책, 방주 밑의 직책)만 (일제가) 잡으면 (징역) 육년, 칠년이요, 방주를 잡으면 팔년, 십년이라, 신법률을 내가지고 그렇게 압박이 심했고 그때는 시기가 그럴 때고 하니까.


또 아버지는 인물이 출중했던 모양이요. 교세가 흥한 이유는 인물과 시기의 두 가지 관계인 것 같은데.


왜놈들이 삭발을 장려가 아니라, 아주 강제 삭발을 시켰지. 시장에 가면 머리를 강제 삭발을 하고 그랬는데, 보천교는 아관청의(峨冠靑衣)라고 갓을 쓰고 푸른 두루마기를 입어. 그래서 왜놈하고 싸움이 사사건건 나고."

 

또 민족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그 중에 조만식이라고 하는 분이 비밀리에 국가를 위해서 임정에서 군비관계로 수금을 하고, 군자금을 보내고 그랬었거든.


조만식 씨라고 평양에 사는 분인데, 여기 위 교인 간부집에서 잽혔어. 그분이 잽혀서 교인 간부들은 고문당하고, 그때 사건이 컸었어요.

 

그러다가 조만식 씨가 나온 후에 벗어부치고 (보천)교에 수호사장(修護使長:외교를 책임지는 직책)으로 한 일년 있다가, 자기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다시 들어갔지.

 

그러다 두번째 나오다가 인천서 왜놈한테 잡히게 됐는데, 그 후에 또 징역살다 나와가지고 교에 피해가 가면 안될 것 같으니까, 다시 평양으로 들어가서 천주교(사실은 기독교)로 종사하셨을 거야. 


그때 무모한 분들이 많았어 그러니까 고하 송진우라고 보천교에 비밀리 군자금 한 분이야. 또 민세라고 평택에 사는 안재홍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해방 후에 건국준비위원장을 하셨어요.

여운형이 하고 그분들도 다 보천교에서 비밀리에 군자금을 가져가고 했는데. 얼마 안 가면은 그분이 군자금 보천교에서 삼만 원인가 얼마 가져간 거 나올 것이요.


다른 사람 개인 사적에 나올테니,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백치문이라고 하는 분하고 비밀리에 상해로 군자금 가져다가 고문당해가지고 그런 분도 있고, 독립투사 비석을 김해에 세 개를 세웠다고 목포에서도 그런 바가 있고, 많았어요.


그리고 보천교에서는 민립대학 창설운동에도 자금을 댔다고 근대사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마지막으로 보천교의 친일문제를 질문하자, 용남옹은 이렇게 그 사정을 말했다.

 


"사실은 내가 기자들에게 많이 당했소. 왜정 때도 '동아일보', '조선일보'에게 교에서 피해를 많이 받고, 저 교에서는 시국대동단결이라고 주장해.

 


일본 중의원 귀족원, 그때 상하 양원이 있었는데, 그 양원에 가가지고 일본이 현재 중국을 침범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양원에 가가지고, 만약 중국을 침범해 들어가면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

 


일본뿐만 아니라 동양삼국이 다 망하니까 그러지 말고 우리나라를 좋게 내놓아가지고, 조선이나 일본이나 중국 삼국이 서세를 막아라 했어요. 이것이 시국황인종 대동단결입니다.

 


아세아주 대동단결, 그래서 왜정 때소위 서천태일랑이라고 하는 사람이 조선의 유사종교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도 보천교에서 쓴 시국대동단결론이 나옵니다.

 


꼭 동포끼리 싸움 붙이고, 교에서도 간부들 매수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종교는 아주 적극 없애기로, 박멸하기로 적극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왜놈이 제일 없애기로 그때 헌 거이, 보천교, 천도교 두 교가 유사종교 책에도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가지고, 보천교는 푸른 점, 천도교는 붉은 점으로 찍어가지고 여러 종교를 다 해놓고도 그렇게 해서 놨어.

 

- 차경석 성도님 아들 차용남 증언

[다시 피는 녹두꽃] 105~108p. 역사문제연구소 1994.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