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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4

<역사왜곡>사마천이 왜곡한 동방 역사의 진실? 사마천이 왜곡한 동방 역사의 진실? 사마천이 왜곡한 동방 역사의 진실? 치우작란蚩尤作亂인가? 황제작란黃帝作亂인가? 『사기』 주석인 집해를 보면 ‘치우는 옛 천자다’라는 글이 나온다. 치우는 단순 제후가 아닌 옛 천자였다는 것이다. 集解應劭曰(집해응소왈) 蚩尤古天子(치우고천자) 그리고 『환단고기』 「삼성기」를 보면 헌원이 난을 일으켰고, 치우천황께서 제압을 해서 신하로 삼았음을 전하고 있다. 又數傳而有慈烏支桓雄(우수전이유자오지환웅)하시니 神勇冠絶(신용관절)하사 다시 몇 세를 내려와 14세 자오지 환웅이 계셨는데, 이분은 신이한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중략) 蚩尤天王(치우천왕)이 見炎農之衰(견염농지쇠)하시고 遂抱雄圖(수포웅도)하사 屢起天兵於西(누기천병어서)하시고 치우천황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날로 쇠약해지.. 2022. 4. 17.
<환단고기>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허구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허구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허구 과연 한국사의 실제적 기원은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시작되었는가? 한국의 주류사학의 주장은 단군조선은 신화이기 때문에 실제적 한국사의 시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의식 때문에 ‘고조선은 단군이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하여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이 기술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 신화시대를 거쳐서 실제적 한국사 기원은 주나라에서 조선후(朝鮮候)로 임명한 기자(箕子)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국이 자행한 또 다른 한민족사 왜곡인 기자箕子조선설입니다. 문화를 전해준 스승국이자 천자국(天子國)인 단군조선을 지워버리고 신하국가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라, 상(은)나라를 이은 주나라가 건국되던 때인 지금부터 약 3,100년 전, ‘주나라 무.. 2019. 4. 29.
<북부여>북부여의 구국 영웅,고두막한-동명왕 북부여의 구국 영웅,고두막한-동명왕 북부여의 구국 영웅,고두막한-동명왕 북부여는 4세 단군에 이르러 역사적인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BCE 109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다스리던 위만조선으로 쳐들어왔다. 한나라는 초기에 연신 패하였으나 이간책으로 위만정권 지도층을 분열시켜 결국 우거를 죽이고 왕검성을 점령하였다(BCE 108). 이때 한 무제는 새로운 점령지에‘ 한나라의 군현[漢四郡]’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고조선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데 그쳐야 했다. 위만정권을 무너뜨린 한 무제는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세 고우루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2017. 8. 25.
<북부여>북부여의 건국,해모수 북부여의 건국,해모수 북부여의 건국,해모수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를 개창한 분이 바로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이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BCE 239년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두하였다.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오가五加 부족장들의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BCE 232). ‘북부여’는‘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인 대부여의 북녘 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 대’자를‘ 북’자로 바꾸어 북부여라 한 것이다. 그것은 망해 가던.. 2017. 8.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