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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14

<고주몽>추모왕과 고구려 건국의 비밀 추모왕과 고구려 건국의 비밀 추모왕과 고구려 건국의 비밀 안병우 / 충북대 교수, 본부도장 현재 우리나라에 고대사와 관련하여 소위 ‘정사正史’로 인정되고 있는 책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전부다. 두 책 모두 삼국 시대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어 엄밀하게 말하면 고대 사서라고 볼 수도 없지만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의 뿌리인 고조선과 고조선을 이은 북부여, 고구려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때 왕명으로 편찬된 사서라고 하나 저자 김부식의 중화사대주의적 역사관이 곳곳에 배어 있어 우리 역사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신라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제1권부터 12권까지 ‘신라본기’, 제13권부터 28권까지.. 2023. 10. 11.
<광개토대왕>광개토호태왕비의 비밀 광개토호태왕비의 비밀 광개토호태왕비의 비밀 호태왕비는 광개토호태열제의 사후 2년 만인 서기 414년에 그의 아들 장수열제가 세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금석문의 기록은 당대에 쓰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후세에 쓰인 사서보다 정확성이 높다고 본다. 호태왕비문도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는 정확성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 비문에 보면 광개토호태왕은 시조로부터 17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태왕은 고주몽으로부터 따지면 왕위로는 19대 왕이요, 혈통으로 따지면 13세손이 된다. 그런데 어째서 호태왕비에서는 17세손이라고 하였을까? 호태왕비가 발견되고 그것을 해독한 이후로 누구도 풀지 못하였던 이 미스터리가 『환단고기』를 통하여 풀렸다. 『환단고기』에서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단군으로 등극한 후 해모수.. 2019. 6. 18.
<고구려>고주몽의 혈통 고주몽의 혈통 고주몽의 혈통 해모수의 장자인 모수리는 북부여의 2대 단군이 되었고, 그의 동생 고진高辰은 고리군의 군왕(稾離郡王)으로 봉작을 받았다. 북부여의 제후인 셈이다. 고진의 손자 불리지弗離支(일명 고모수高慕漱)가 있었는데 이 불리지가 바로 하백의 딸 유화와 사통한 주인공으로 고주몽의 아버지이다. 그러니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라 고손자高孫子가 된다. 고주몽이 태어난 해는 서기전 79년 임인년壬寅年이고 생일은 5월 5일이다. 이것이 『환단고기』가 밝혀 주고 있는 고주몽의 혈통과 탄생에 관한 비밀이다. 불리지는 요절하였기 때문에 미혼모 유화는 어린 고주몽을 안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동부여의 해부루 왕에게 찾아갔다. 해부루는 혈통으로 보자면 고주몽의 7촌 아저씨였으므로 흔쾌히 고주몽과 유화를 .. 2019. 6. 18.
<동명왕>해부루의 동부여와 고두막한의 북부여(졸본부여) 해부루의 동부여와 고두막한의 북부여(졸본부여) 해부루의 동부여와 고두막한의 북부여(졸본부여) 한무제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고두막한은 고우루 단군에게 제위를 물러나라고 요구하였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고우루 단군이 붕어하자 그의 동생 해부루가 뒤를 이어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고두막한이 군대를 보내 계속 위협하므로 해부루는 국상 아란불의 주청을 받아들여 가섭원으로 옮겨 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부여이다. 동부여의 탄생은 한무제의 북부여 침공과 구국의 영웅 고두막한이 배경에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이와 같은 장황한 스토리를 모두 생략하고 지극히 신화적으로 기술한 까닭에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절름발이 기록이 되고 말았다. 「북부여」에서 아란불에게 꿈에 나타나 .. 2019. 6. 17.
<고두막한>고조선,북부여,한사군 고조선,북부여,한사군 고조선,북부여,한사군 고조선은 본래 초대 단군왕검께서 나라를 진한, 번한, 마한이라는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진한은 북만주, 마한은 한반도, 번한은 요동, 요서, 하북성, 산동성, 절강성까지 포함하는 중국 대륙 동부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삼한은 나중에 삼조선으로 관제가 변경이 되었기 때문에 진한은 진조선, 번한은 번조선, 마한은 막조선이 되었다. 단재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에서 삼조선을 말하고 있다. 한편 해모수 단군이 붕어하던 서기전 195년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번조선의 기준왕에게 망명을 요청하였다. 준왕은 위만에게 연나라와의 접경 지대인 서쪽 변방의 국경수비대 임무를 맡겼으나, 위만은 그 은혜를 배반하고 1년 뒤에 준왕의 왕험성으로 쳐들어와서 나라를 강탈하였다. .. 2019. 6. 17.
<환단고기>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 『환단고기』에서는 임술년 4월 초파일 진나라 시황제 때 해모수가 23세의 나이로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서 북부여를 건국하였다고 나온다. 이때의 임술년은 서기전 239년이다. 연대는 다르지만 『삼국유사』에 해모수가 임술년 4월 초파일에 북부여를 건국하였다는 부분만은 일치한다. 고조선은 초대 단군왕검이 건국한 지 1908년이 경과한 시점에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고, 그로부터 188년 후인 서기전 238년에 2096년의 장구한 역사를 뒤로한 채 문을 닫게 되는데 바로 1년 전인 서기전 239년에 해모수가 등장하여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해모수의 북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로서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왕을 단군이라고 칭하였다. 해모수 단군은 재위 45년인 서기전 195년.. 2019. 6. 17.
<고주몽>해모수는 고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고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고주몽의 아버지? 몇 해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주몽’에서는 고주몽과 해모수를 부자 관계로 그리고 있다. ‘주몽’의 작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위주로 대본을 구성한 듯하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자세히 비교하면서 읽어 보면 이것을 쉽게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왕편’을 보면 해모수가 유화와 사통私通하여 낳은 아들이 고주몽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좀 다르다. 이와 연관된 내용이 「북부여기」, 「동부여기」, 「고구려기」에 조금씩 나오는데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삼국유사』 원문에는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등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모두 국명을 지칭하는 것이기에 이들.. 2019. 6. 17.
<환단고기 북콘서트>신교를 뿌리내린 백제의 문화 역사정신 신교를 뿌리내린 백제의 문화 역사정신 신교를 뿌리내린 백제의 문화 역사정신 백제 왕조 성립사 백제 왕조 역사의 성립을 한번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백제 왕조 성립사에서 그 시조는 형인 비류沸流와 그 아우인 온조溫祚입니다. 온조가 한성, 지금의 서울에서 백제를 건국하고 약 5백 년간 한성 백제 시대를 계속하다가, 고구려에게 공격을 당해서 웅진熊津(공주)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백제 시조 온조는 본래 그 아버지가 고주몽高朱蒙 아니에요? 『삼국사기』에서는 비류와 온조를, 고주몽이 부여 왕의 딸과 혼인해서 낳은 아들이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다른 설을 소개하여, 과부가 된, 대상大商 연타발延陁勃의 딸 소서노召西弩가 북부여 왕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결혼해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합니다... 2018. 1. 31.
<고구려>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북부여는 비록 고조선을 계승하였지만, 고조선의 전 영역을 흡수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열국列國의 분열시대가 시작되어 고조선의 옛 영토에는 북부여, 동부여, 서부여, 낙랑국, 남삼한, 옥저, 동예 등의 여러 나라가 형성되었다. 열국시대는 그 후 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거쳐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로 변화하였다. 그렇다면 북부여의 국통은 어디로 계승되었는가?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북부여의 고무서단군은 자신을“ 천제의 아들(天帝子)”이라고 밝히는 주몽을 범상치 않은 인물로 여겨 둘째 딸인 소서노를 주어 사위로 삼았다. 아들이 없던 단군은 재위 2년 만에 붕어하면서 그에게 대통을 물려주었다(BCE 58.. 2017. 11. 3.
<부여>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후한서, 삼국지 등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사는 모두 서부여의 역사이다. 서부여는 동부여가 망한 후 요서에 생긴 망명부여로서, 서부여사는 부여의 끝자락 역사이다. 예를 들어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울구태蔚仇台, 간위거簡位居, 마여麻余, 의려依慮 등은 모두 서부여의 왕이다. 그런데도 강단사학계에서 나온 책과 논문들은 서부여를 부여의 원래 모습인 양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부여에 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는 중국 사서의 기록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부여의 원형이 처참히 파괴되고 한국사의 허리가 잘려 버렸다. 한국사의 국통 맥이 어지러워지고 뿌리 역사가 소멸되었다. 북부여라는 잃어버린 고리가 고조선과 고.. 2017. 8. 29.
<북부여>북부여의 구국 영웅,고두막한-동명왕 북부여의 구국 영웅,고두막한-동명왕 북부여의 구국 영웅,고두막한-동명왕 북부여는 4세 단군에 이르러 역사적인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BCE 109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다스리던 위만조선으로 쳐들어왔다. 한나라는 초기에 연신 패하였으나 이간책으로 위만정권 지도층을 분열시켜 결국 우거를 죽이고 왕검성을 점령하였다(BCE 108). 이때 한 무제는 새로운 점령지에‘ 한나라의 군현[漢四郡]’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고조선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데 그쳐야 했다. 위만정권을 무너뜨린 한 무제는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세 고우루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2017. 8. 25.
<북부여와 남삼한>북쪽에는 북부여, 남쪽에는 남삼한 북쪽에는 북부여, 남쪽에는 남삼한 북쪽에는 북부여, 남쪽에는 남삼한 준왕이 망하고 위만정권이 들어선 사건은 한민족에게 또 다른 역사 개척의 계기가 되었다. 번조선 땅이 위만에게 강탈당하자 상장군 탁卓이 사람들을 이끌고 한강 이남으로 이주하여 새로이‘ 마한’을 세웠다(BCE 194). 옛 진조선과 막조선의 일부 백성들도 한강 아래로 남하하여 각기‘ 진한’과‘ 변한’을 세웠다. 마한은 호남의 익산을, 진한은 경북 경주를, 변한은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비록 불의한 위만정권 때문에 남하한 것이지만, 한강 이남에서 새로운 삼한시대를 연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주창하여 한반도에 형성된 삼한을‘ 후삼한(남삼한)’이라 부르면서, 고조선 시대의‘ 전삼한(북삼한)’과 구별하였다. .. 2017.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