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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잊혀진 역사

<불가리아>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

by 이세덕 2017. 8. 28.

<불가리아>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

<불가리아>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

 

강단 사학계는 부여 역사를 외면하지만, 부여사는 단재 신채호가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민족사의 골간을 이룬다.

 

몇 안 되는 부여사 연구가 중에 신용하 교수는, 부여가 최소한 BCE 5세기부터 CE 5세기까지 약 천여 년 동안 만주 일대에 존재하였으며 CE 4세기 전반까지 동북아의 최선진국이었다고 말한다. CE 5세기라면『 환단고기』가 전하는, 북부여에서 분파된 마지막 부여인 연나부부여(서부여)가 멸망한 때(494)와 일치한다.

 

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 말경 부여족의 일파가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지방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 5∼7세기 초까지 돈강 유역과 북캅카스 지역으로 계속 이주하였다. 7세기의 서양사에서부터 불가Bulghar족의 역사가 나오는데, 이 불가족이 곧 부여족이다.‘ 불가’란‘ 부여(불)의 가加’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635년 불가족은 족장 쿠브라트Kubrat의 지도력 아래‘ 대大 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하였다. 하지만 몇 년 후 그가 사망하였고(642), 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싸움으로 불가리아를 해체시켰다. 그 중 세 아들이 이끈 불가족은 결국 주변 민족에 복속되고 말았지만, 둘째와 셋째 아들은 독립국가를 세웠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가 세운 나라,‘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은 14세기까지 번성하였고, 현재는 타타르 자치공화국(1920년 소비에트연방의 자치 공화국으로 성립됨)으로 존재한다. 타타르인의 언어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하고, 생김새도 동양인의 모습이다.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오늘날의 발칸 반도로 남하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로마군 장교의 기록에 의하면, 불가족은 로마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이것은 환단 시대 이래로 동방 한민족이 일관되게 거행해 오던 천제 풍속을 서방으로 이주한 부여족도 그대로 따랐음을 보여준다.

 

이 불가족은 마침내 로마군을 물리치고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을 건국하였다. 불가족은 귀족 계층이 되어 보야Boyar(부여의 유사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 불렸고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황제 크룸Krum에 이르러 주변의 로마군을 대부분 추방하고 수도를 옮겨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라 불렀다. 황제는 소비의 산에 올라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 산 이름을 발칸산으로 정하였다. 신 교수는‘ 발칸산’을‘ 밝안산’‘, 밝산’‘, 백산白山’등의 우리말 지명과 동일한 것으로 보며, 한민족은 고대로부터 백산(밝은 산)에 올라 제천 의식을 행하였다고 말한다. 지금도 크룸 황제의 제천 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는 이 발칸산에서 발칸 반도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크룸 황제가 병사한(814) 후 불가리아는 국력이 점점 약화되었다. 12세기에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을 세웠지만 그 지배층은 제1제국 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슬라브족의 생김새를 많이 띠게 되었다.

 

그렇지만 발칸 산, 발칸 반도, 소비 등의 지명 속에 부여의 자취가 남아 있고, 불가리아 말의 문법 구조와 풍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에서도 한민족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불가리아인은 백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갓난아기의 엉덩이 반점, 일명 몽고반점이 나오는 민족이다. 이 모든 것은,‘ 불가리아는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라는 신 교수의 주장처럼, 불가리아의 원 조상이 바로 부여족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