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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한민족 X파일

<역사왜곡>사마천이 왜곡한 동방 역사의 진실?

by 이세덕 2022. 4. 17.

<역사왜곡>사마천이 왜곡한 동방 역사의 진실?

사마천이 왜곡한 동방 역사의 진실?


치우작란蚩尤作亂인가? 황제작란黃帝作亂인가?

『사기』 주석인 집해를 보면 ‘치우는 옛 천자다’라는 글이 나온다. 치우는 단순 제후가 아닌 옛 천자였다는 것이다.

集解應劭曰(집해응소왈) 蚩尤古天子(치우고천자)

그리고 『환단고기』 「삼성기」를 보면 헌원이 난을 일으켰고, 치우천황께서 제압을 해서 신하로 삼았음을 전하고 있다.

又數傳而有慈烏支桓雄(우수전이유자오지환웅)하시니 神勇冠絶(신용관절)하사
다시 몇 세를 내려와 14세 자오지 환웅이 계셨는데, 이분은 신이한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중략)

蚩尤天王(치우천왕)이 見炎農之衰(견염농지쇠)하시고 遂抱雄圖(수포웅도)하사
屢起天兵於西(누기천병어서)하시고
치우천황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날로 쇠약해지는 것을 지켜보시고 드디어 웅대한 포부를 품고 여러 번 서쪽에서 천자天子의 군사[天兵]를 일으키셨다.

又自索度(우자삭도)로 進兵(진병)하사 據有淮岱之間(거유회대지간)하시고
삭도索度에서 군사를 진격시켜 회수와 태산 사이의 땅을 점령하시고

及軒侯之立也(급헌후지입야)에 直赴涿鹿之野(직부탁록지야)하사
擒軒轅而臣之(금헌원이신지)하시고
헌후軒侯(헌원)가 왕위에 오르자 바로 탁록涿鹿의 들로 진격하여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으셨다.

『삼성기』 하를 보면 14세 자오지 환웅은 치우천황의 본래 호칭이다. 거기에 치우천황이 151세로 가장 오래 살았다고 나와 있다. 노자·장자가 선언한 선도仙道문명의 원조가 바로 치우천황이다. 그것을 사상적으로 체계를 세운 분은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선사紫府仙師인데, 황제헌원도 자부선사에게 와서 신선이 되는 도를 배웠다. 『포박자抱朴子』를 보면, 황제헌원은 배달국의 자부선사로부터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전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昔黃帝到青丘(석황제도청구) 過風山(과풍산) 見紫府先生(현자부선생) 受三皇內文(수삼황내문) 以劾召萬神(이핵소만신)
옛날에 황제헌원이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뵙고 『삼황내문』을 전해 받고서 만신을 부리게 되었다. (『포박자抱朴子』 내편內篇 지진地眞)

그런데 사마천은 한족 중심의 역사를 세우기 위해 헌원을 높이면서 가르침을 전한 동방 배달국의 자부선생의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사마천은 오히려 동방 배달 역사를 왜곡하고 뒤집어 기록하였다.

후대 중국의 왕조들은 치우천황을 전쟁신戰爭神으로 높이 받들었다. 전쟁을 하기 전에 반드시 치우천황에게 천제를 올렸다. 대표적인 예가 한나라의 시조 유방劉邦이다. 유방은 풍패豐沛에 치우천황 사당을 짓고 아주 비장한 각오로 천제를 올리고 승리를 축원했다. 치우천황이 황제헌원에 허무하게 패배했다면 어찌 전쟁신으로 받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무왕은 기자를 봉했을까? 기자는 무왕의 신하?
기자조선의 문제는 사마천의 글을 곱씹어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사마천은 자신도 모르게 “어시무왕내봉기자어조선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 이불신야而不臣也”라고 했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앞뒤가 맞지 않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제후로 봉했으면 당연히 주나라의 신하가 되어야 할 텐데, ‘이불신야’라 하여 신하로 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사마천의 기록에서 두 가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첫째, 무왕이 은나라를 붕괴시키자 기자가 동방 조선의 강역으로 도망갔다는 것이고, 둘째, 기자가 가서 조선을 연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아 모순을 드러낸 사마천의 기록은 오히려 동방 조선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과, 주나라의 영향권에 있지 않던 기자가 동방 조선의 변방으로 망명했음을 알게 해 준다.

사마천은 기자조선이 허구라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게 고백했다. 우리는 기자조선의 진실을 동방 조선의 기록인 『환단고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위만은 조선의 계승자인가? 도적인가?
서기전 2333년 단군왕검이 조선을 열었다는 것을 『삼국유사』와 『환단고기』는 공히 인정한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 시대 동방 조선의 역사서들도 단군왕검을 전했다. 그리고 구한말의 교과서에도 부루 태자가 지나의 우임금을 만나 치수 사업을 도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중국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사마천은 의도적으로 동방 조선 역사의 첫 줄에 위만을 세웠다. 이러한 사마천의 기록에 따라 일본도 위만조선을 중심에 놓고 조선의 역사를 왜곡했다.

동방 역사의 맥을 잡은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 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내일강도乃一强盜].”라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연나라 출신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일 뿐이다. 잠시 번조선 강역을 차지한 위만을 현 교과서에서는 중화사관과 일제식민사관이 못 박아 놓은 사관 그대로 인정하여 칭송한다. 당당히 단군조선의 계승자라 칭한다. 그리하여 2,096년 단군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아직도 암송되고 있다.

 

동방 조선의 정신으로 역사를 올바로 보자
이런 사마천의 붓장난에 동방 문화의 종주국이자 천자국인 조선의 역사는 심하게 왜곡·날조되었다. 환웅천황의 배달倍達과 단군의 조선朝鮮은 지나支那 고대사를 이루는 하상주夏商周에 문명을 전수한 선생국임에도, 역사를 뒤집어 기록한 것이다.

물론 사마천이 살던 때도 배달과 단군조선 초기의 역사 도서를 제대로 읽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2천 년 전의 기록을 쉽게 알지 못한 사마천은 너무나 거침없이 동방 종주국의 역사를 왜곡했다. 결과적으로 사마천의 『사기』는 동방 조선의 역사맥을 틀어 놓은 첫째 책이 되고 말았다. 사마천 이후 『한서』, 『삼국지』, 『후한서』 등도 사마천의 기록을 따라 기술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중국인의 기록을 100% 믿고 그대로 옮겨 놓은 지나인의 교과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심에 사마천의 『사기』가 있다. 아울러 전 지구촌의 교과서도 동방 조선은 독자적인 천자관이나 우주관이 없는 나라로, 중국의 아류이자 중화문명의 속국으로 인정되고 말았다. 동방 조선의 치우천황과 마흔일곱 분 단군의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삼국유사』 「고조선」 조와 『환단고기』 기록을 사마천의 『사기』와 비교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대한인의 눈으로 명확히 확인해야 한다. 올바른 역사를 후손에게 전해 줘야 한다. 그 중심에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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