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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4

<고두막한>동명성왕 고주몽 동명성왕 고주몽 동명성왕 고주몽 고주몽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성왕 혹은 동명제라고 칭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런 설명이 없다. 왜 그런 칭호를 얻었는지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역사 왜곡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동명제는 원래 고두막한이다. 그가 스스로 ‘동명東明’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고두막한은 졸본 땅에 부여를 세운 다음 졸본부여라고 했고, 동명부여라고도 했다. 그래서 동명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부르게 되었는가? 좁게 보면 고두막한만이 동명왕이 되는 것이지만 넓게 본다면 고두막한을 이은 고무서 단군, 또 그 뒤를 이은 고주몽도 동명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모두 동명부여의 왕이기 때문이.. 2019. 6. 18.
<동명왕>해부루의 동부여와 고두막한의 북부여(졸본부여) 해부루의 동부여와 고두막한의 북부여(졸본부여) 해부루의 동부여와 고두막한의 북부여(졸본부여) 한무제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고두막한은 고우루 단군에게 제위를 물러나라고 요구하였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고우루 단군이 붕어하자 그의 동생 해부루가 뒤를 이어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고두막한이 군대를 보내 계속 위협하므로 해부루는 국상 아란불의 주청을 받아들여 가섭원으로 옮겨 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부여이다. 동부여의 탄생은 한무제의 북부여 침공과 구국의 영웅 고두막한이 배경에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이와 같은 장황한 스토리를 모두 생략하고 지극히 신화적으로 기술한 까닭에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절름발이 기록이 되고 말았다. 「북부여」에서 아란불에게 꿈에 나타나 .. 2019. 6. 17.
<고주몽>해모수는 고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고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고주몽의 아버지? 몇 해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주몽’에서는 고주몽과 해모수를 부자 관계로 그리고 있다. ‘주몽’의 작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위주로 대본을 구성한 듯하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자세히 비교하면서 읽어 보면 이것을 쉽게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왕편’을 보면 해모수가 유화와 사통私通하여 낳은 아들이 고주몽이라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좀 다르다. 이와 연관된 내용이 「북부여기」, 「동부여기」, 「고구려기」에 조금씩 나오는데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삼국유사』 원문에는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등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모두 국명을 지칭하는 것이기에 이들.. 2019. 6. 17.
<북부여>북부여의 구국 영웅,고두막한-동명왕 북부여의 구국 영웅,고두막한-동명왕 북부여의 구국 영웅,고두막한-동명왕 북부여는 4세 단군에 이르러 역사적인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BCE 109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다스리던 위만조선으로 쳐들어왔다. 한나라는 초기에 연신 패하였으나 이간책으로 위만정권 지도층을 분열시켜 결국 우거를 죽이고 왕검성을 점령하였다(BCE 108). 이때 한 무제는 새로운 점령지에‘ 한나라의 군현[漢四郡]’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고조선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데 그쳐야 했다. 위만정권을 무너뜨린 한 무제는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세 고우루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2017.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