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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6

<환단고기 북콘서트>신교를 뿌리내린 백제의 문화 역사정신 신교를 뿌리내린 백제의 문화 역사정신 신교를 뿌리내린 백제의 문화 역사정신 백제 왕조 성립사 백제 왕조 역사의 성립을 한번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백제 왕조 성립사에서 그 시조는 형인 비류沸流와 그 아우인 온조溫祚입니다. 온조가 한성, 지금의 서울에서 백제를 건국하고 약 5백 년간 한성 백제 시대를 계속하다가, 고구려에게 공격을 당해서 웅진熊津(공주)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백제 시조 온조는 본래 그 아버지가 고주몽高朱蒙 아니에요? 『삼국사기』에서는 비류와 온조를, 고주몽이 부여 왕의 딸과 혼인해서 낳은 아들이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다른 설을 소개하여, 과부가 된, 대상大商 연타발延陁勃의 딸 소서노召西弩가 북부여 왕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결혼해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합니다... 2018. 1. 31.
<부여>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후한서, 삼국지 등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사는 모두 서부여의 역사이다. 서부여는 동부여가 망한 후 요서에 생긴 망명부여로서, 서부여사는 부여의 끝자락 역사이다. 예를 들어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울구태蔚仇台, 간위거簡位居, 마여麻余, 의려依慮 등은 모두 서부여의 왕이다. 그런데도 강단사학계에서 나온 책과 논문들은 서부여를 부여의 원래 모습인 양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부여에 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는 중국 사서의 기록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부여의 원형이 처참히 파괴되고 한국사의 허리가 잘려 버렸다. 한국사의 국통 맥이 어지러워지고 뿌리 역사가 소멸되었다. 북부여라는 잃어버린 고리가 고조선과 고.. 2017. 8. 29.
<불가리아>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 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 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 강단 사학계는 부여 역사를 외면하지만, 부여사는 단재 신채호가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민족사의 골간을 이룬다. 몇 안 되는 부여사 연구가 중에 신용하 교수는, 부여가 최소한 BCE 5세기부터 CE 5세기까지 약 천여 년 동안 만주 일대에 존재하였으며 CE 4세기 전반까지 동북아의 최선진국이었다고 말한다. CE 5세기라면『 환단고기』가 전하는, 북부여에서 분파된 마지막 부여인 연나부부여(서부여)가 멸망한 때(494)와 일치한다. 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 말경 부여족의 일파가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지방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 5∼7세기 초까지 돈강 유역과 북캅카스 지역으로 계속 이주하였다. 7세기의 서양사.. 2017. 8. 28.
<북부여와 남삼한>북쪽에는 북부여, 남쪽에는 남삼한 북쪽에는 북부여, 남쪽에는 남삼한 북쪽에는 북부여, 남쪽에는 남삼한 준왕이 망하고 위만정권이 들어선 사건은 한민족에게 또 다른 역사 개척의 계기가 되었다. 번조선 땅이 위만에게 강탈당하자 상장군 탁卓이 사람들을 이끌고 한강 이남으로 이주하여 새로이‘ 마한’을 세웠다(BCE 194). 옛 진조선과 막조선의 일부 백성들도 한강 아래로 남하하여 각기‘ 진한’과‘ 변한’을 세웠다. 마한은 호남의 익산을, 진한은 경북 경주를, 변한은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비록 불의한 위만정권 때문에 남하한 것이지만, 한강 이남에서 새로운 삼한시대를 연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주창하여 한반도에 형성된 삼한을‘ 후삼한(남삼한)’이라 부르면서, 고조선 시대의‘ 전삼한(북삼한)’과 구별하였다. .. 2017. 8. 24.
<북부여>북부여의 건국,해모수 북부여의 건국,해모수 북부여의 건국,해모수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를 개창한 분이 바로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이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BCE 239년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두하였다.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오가五加 부족장들의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BCE 232). ‘북부여’는‘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인 대부여의 북녘 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 대’자를‘ 북’자로 바꾸어 북부여라 한 것이다. 그것은 망해 가던.. 2017. 8. 23.
<북부여>잃어버린 역사 북부여-환단고기 잃어버린 역사 북부여-환단고기 잃어버린 역사 북부여-환단고기 북부여의 건국,해모수 단군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를 개창한 분이 바로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이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BCE 239년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두하였다.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오가五加 부족장들의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BCE 232). ‘북부여’는‘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인 대부여의 북녘 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 대’자를‘ 북’자로 .. 2017.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