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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탐험/안경전 종도사님 말씀

<환단고기 북콘서트>백제 문화의 정수

by 이세덕 2018. 2. 3.

<환단고기 북콘서트>백제 문화의 정수

<환단고기 북콘서트>백제 문화의 정수


신교의 종통 계승과 완성
백제 문화는 우주광명 원형문화 신교의 종통을 계승하고 그것을 크게 성숙시켰습니다. 신교문화의 근원은 천상 북두칠성에 있는 우주의 수도 옥경玉京 문화입니다. 그 옥경에는 상제님의 궁전 광한전廣寒殿이 있는데 그 광한전을 여기 남원南原에다가 갖다 놨어요. 저 남원에 있는, 춘향전의 배경이 된 광한루廣寒樓는 천상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지상에 베껴 놓은 것입니다.

또 하남시河南市에 가보면 이성산성二聖山城이라든지 교산동 토성土城 같은 데에 북두칠성 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백제는 신교문화의 중추신경이라 할 수 있는 삼신오제三神五帝 문화를 계승했습니다. 백제는 온조왕 때부터 천제를 지냈어요. 2세 다루왕 때도 남쪽 제단에서 천제를 지냈습니다. 또 오제五帝를 신앙했는데, 우주의 동서남북 중앙 오제와 천신에게 사중월四仲月, 한 계절의 중간 달인 2월, 5월, 8월, 11월로 1년에 네 번씩 제사를 지냈습니다. 삼신상제님과 오방위 천신들에게 제를 지내는 것은 문화의 종주에서만 행할 수 있는 큰 제사문화인데요. 서양문화에는 이런 우주관이 없어서 이런 문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환국에서 문화가 제대로 넘어가지 못했어요.


백제는 민중 미륵신앙의 세계 중심지
백제는 미륵신앙의 세계 중심지입니다.

우리가 불교 중심으로 보면 우주광명 부처, 법신불이 인간으로 화한다고 하는 미래의 부처, 미륵불이 인류 역사를 근본적으로 개벽하고 인류의 마음을 부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중심이 지금의 김제 금산사金山寺입니다. 여기에 진표眞表 스님이 와서 미륵전을 세웠습니다. 이분이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아주 혹독한 방법으로 참회를 하면서 결국은 미륵님으로부터 직접 도통을 받았습니다.

익산의 미륵사지彌勒寺址는, 미륵님의 천상 용화낙원을 완성한다고 하는 상징으로, 가서 보면 장엄합니다. 여기에 9층 석탑이 있고, 3탑과 3금당이 있어요. 미륵은 3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3회 설법을 해서 인류를 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미륵님이 원래 도솔천 천주님으로 인류의 원형문화, 삼신문화의 원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동빈呂洞賓이라는 분이 도를 통해서 천상에 가보니까 도솔천의 원주인이 바로 하나님이고 삼신상제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가에는 그렇게 깨달은 사람이 문헌에 없습니다. 그런데 있기는 있어요. 왜냐? 절에 가보면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문화가 있어요. 석가불보다 더 높은 지존의, 우주의 궁극의 부처님 말입니다.

백제 무왕武王이, 앞으로 오시는 미륵님의 꿈을 이루려는, 미륵님의 대행자 전륜성왕轉輪聖王, 샹카대왕을 자처했습니다. 26세 성왕聖王은 일본에 미륵불 문화를 전했습니다. 광륭사廣隆寺에 있는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은 일본의 국보 1호입니다. 지구촌에 억만 개의 문화재가 있지만, 이 불상은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말했듯이 ‘진실로 완벽한 인간 실존의 최고 경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정말로 우주의 진리의 인간, 태일 인간이 된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조각품입니다.

신라 최초의 절로 미륵불을 모신 흥륜사興輪寺가 있었는데, 제가 그 공업고등학교 마당에 가보니까 절터가 그런대로 남아 있더라고요. 그리고 백제에는 미륵불을 모신 익산 미륵사彌勒寺가 있어요. 미륵사에는 처음 세웠던 9층 목탑을 근거로 해서 9층 석탑을 세웠는데, 이 석탑이 석가탑의 기원이 됐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백제의 예술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를 보면 아래에 용이 있고 위에 봉황새가 여의주를 딛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악사樂士들이 있고, 그 악사들의 아래 문양과 연꽃이 3단으로 돼 있는 데, 사실은 이것이 아마 지구의 예술의 극치일 것입니다. 또 백제의 왕이 일본에 전해 준 바둑판을 제가 일본에 가서 보니 참 놀라웠습니다. 백제의 조각품이라든지 문화 예술품은 지구에서 정상, 극치를 달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 동방 신교, 우주 문화를 전수한 과정
백제는 일본에 동방 신교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은 오히려 패망을 당하고, 35년 노예생활을 하면서 약 8백만 이상이 무참하게 죽고, 그리고 역사 뿌리가 말살됐습니다.

그런데 백제 좌현왕이 일본을 통치했습니다. 50세 간무(桓武) 천황은 우주광명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일본 역사 뿌리를 내린 사람입니다.

한반도에서 백제 사람들이 얼마나 일본에 건너가서 살았는가? 『속일본기續日本紀』를 보면, 기내畿內 지역의 인구는 80~90%가 백제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내 지역은 일본 조정이 있던 나라(奈良),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효고 현(兵庫縣) 일부입니다. 효고 현에는 치우천황의 문화가 들어갔어요. 아스카 문명의 발상지인 다카이치 군(高市郡) 즉 나라 현도 80~90%가 백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 고대사의 실체는 단순히 그냥 문화를 전수받은 것이 아니고, ‘백제 사람, 한반도 한국인들의 이민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일본에 문화를 전한 백제계 왕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가타카나, 히라가나 언어를 만든 분은 이 전라도 호남에서 간 왕인 박사王仁博士입니다. 일본에 문화를 전한 왕인과 아직기阿直岐가 다 왕족인데, 제가 아직기 왕자를 찾아 일본을 가보니까 그 신사가 텅텅 비어 있고, 실제로 모시지 않아요. 일본에는 백제왕을 모시는 신사도 있고, 왕인 박사를 섬기는 신사, 무덤도 있는데 사람들이 전혀 가지 않아서 그 신사가 초라하고 조금 있으면 폐사가 될 지경입니다.

29세 흠명欽明(539~571) 왕은 일본인이 아닙니다. 백제 성왕이 50명 특공대를 가지고 신라군과 싸우다가 잡혀서 죽은 걸로 알려져 있지만, 변복을 하고 일본에 가서 흠명 왕이 됐다는 설이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학자가 그런 주장을 하고 홍윤기 교수님도 주장하는데, 이 흠명 왕이 백제에서 불상을 받아서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를 보급했습니다.

그리고 미륵반가사유상은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이 전했다고 하지만, 그 기술은 백제 기술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 나무는 강원도 태백산에서 나는 홍송紅松이라 하는데, 지금 일본에서는 자기 나라에서 나는 나무이고, 자기들 기술로 만든 것이라고 거짓말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30세 민달敏達(572~585), 비다쓰 일본 왕은 백제 사람입니다.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기록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책 원본을 가지고 있는 우에다 마사아키라는 분을 홍윤기 교수가 직접 만나서 그 원본을 읽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는 말씀도 들었어요.

비다쓰 왕은 백제 관복을 입고 백제 말을 했으며, 신하들도 전부 백제 관복을 입었습니다. 백제 궁궐을 짓고 ‘대정大井’이라는 백제 우물을 파고, 장례식도 백제 장례식으로 치렀어요.

33세 추고推古(592~628) 왕은 아스카 문화를 크게 열었는데, 이복 오빠인 민달왕의 황후였어요. 34세 서명舒明(629~641) 왕은 백제궁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짓고 9층탑을 세웠습니다.

37세 제명齊明(655~661) 왕, 사이메이는 백제가 멸망당할 때 백강구白江口 전투에 군사 2만7천 명, 선박 4백 척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패망을 당하자 그 일본 군사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는 이제 영원히 조국, 아버지 나라에 올 수가 없다’고 했다는 전설과 기록이 있습니다.

40세는 천무天武(673~686), 텐무인데 조선시대 수양대군首陽大君 같은 사람입니다. 천무는 자기 형의 어린 아들을 죽여버리고 천신과 약속을 합니다. ‘내가 왕권을 잡으면 당신을 우리나라 국조신國祖神으로 받들겠다’고 했는데 그 신이 유명한 여자 신명,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입니다. 그래서 일본 국조신이 40세 천무 때 나왔어요.

50세 환무桓武(781~806)는 환桓의 정신을 부활시켜 헤이안(平安) 시대를 열었습니다. 환무는 광인光仁(770~781) 왕의 아들인데, 백제 성왕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고 백제계가 분명합니다. 49세 이후 지금 125세 왕까지 전부 백제계입니다. 일본의 왕은 백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주 확실하게 역사의 진실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일본 왕이 ‘우리 먼 어머니의 계열은 화신립和新笠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화신립은 누구인가? 바로 광인 왕의 왕비입니다. 일본에 순타 태자純陀太子(?~514)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백제 무령왕의 아들이고, 이 순타의 딸이 화신립和新笠, 야마토노 니이가사입니다. 야마토 왕조의 대화大和 사상은 바로 윗대 조상들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우주광명 문화, 대화가, 하나의 생활실천 사상으로 나온 겁니다.

제가 화신립이라는 환무의 어머니 무덤에도 한 번 가봤는데, 청룡·백호도 없고 시원찮았어요.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수된 문화·문물
일본의 문화 역사에서 보면, 놀라운 것이 무엇인가?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있습니다. 일본 18대 전지腆支 왕 때 전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세先世 이래 이와 같은 무기가 없었다’고 하면서 왜왕에게 하사한 하행下行의 외교문서는 백제와 일본의 종속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칠지도는 홍산문화에서 나온 옥검玉劍과 그 형상이 유사해요. 칠지도는 칠성문화를 근거로 해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의 문화에서 크게 좀 깨우쳐야 되는 게 ‘사무라이 문화’입니다.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신라의 화랑花郞, 백제의 기사도 무절武節과 같은 삼국의 신교 무사 집단이 일본에 들어갔습니다. 일본 요시노산(吉野山) 금봉산사金峯山寺는 수험도修驗道의 본부인데, 거기를 가보면 수험도를 닦는 사람들이 고구려 조의선인처럼 검은 옷을 입어요.

일본에는 지도에서 보듯이 여러 곳에 수험도 도장이 있습니다. 규슈에 가보면 영언산英彦山에 환웅상桓雄像을 모신 곳도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동방 기사단으로서 여러 곳에서 각기 고구려적인, 백제적인, 신라적인 낭가郎家 문화를 열었습니다. 이처럼 일본의 사무라이, ‘칼잡이 문화’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동방 원형 기사단 문화를 융합한 것입니다.


일본 내 백제계와 신라계의 싸움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지배한 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원래 빈천한 집안 출신인데 귀족 명문 집안에 양자로 가서 교육을 받고 유학도 가고 했어요. 안중근에게 총 맞아 죽은 이등박문은 동아시아를 다 삼키려 했던 자인데, 이 사람이 본래 사무라이 가운데서 닌자(忍者)였습니다.

일본의 명치明治(1867~1912)의 아버지 효명孝明(1846~1866)은 워낙 완고했기 때문에 일본의 개화파들이 명치의 아버지를 제거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일부에서 그런 정보가 책으로도 묶여져 나왔지만, 우리나라에 초대 통감統監으로 온 이등박문伊藤博文이 그때 닌자, 자객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효명 왕이 화장실에 올 때, 칼을 가지고 그 아래 들어가서 항문을 찔러서 급사시켰다는 일본학자의 글이 있어요.

일본에 명치유신明治維新(1868)이 일어나기 전에 조슈(長州) 번藩에서 변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의 무사 계급을 대표하는 성씨가 두 가지가 있는데, 신라계는 겐지(源氏)이고 백제계는 헤이씨(平氏)입니다. 겐지는 흰색 깃발을 들고, 헤이씨는 붉은 깃발을 세우고 싸웠어요. 이 두 집안의 싸움을 겐페이노 다다카이(源平の戦い)라 부르는데, 겐지냐 아니면 헤이씨냐 해 가지고 막부幕府에서 정권을 주고받았어요.


일광 동조궁과 에도시대
임진란 때 쳐들어 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기 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내 아들이 커서 그릇이 되면 네가 보필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네가 천하를 가지라’고 했다는 말이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20대가 되어서 오사카 성에서 도쿠가와와 맞장을 떴습니다. 한 달 이상 싸우고 물러갔다가 해가 바뀌자 또 쳐들어왔는데 그때 히데요리가 무참하게 죽잖아요. 그 어머니는 아들 배를 찌르고, 히데요리는 자기 어머니 배를 찔렀다고 합니다. 제가 30년 전에 답사했을 때는 그 위패가 오사카 성 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그러고서 도쿠가와가 후세를 기약하면서 자청해서 동경東京으로 가서 부임을 했는데 그게 에도(江戶)시대의 시작입니다. 일본은 역사 대세가 조국의 고향에서 자꾸 떨어져서 동쪽으로 가는 과정이에요. 중국도 서방에서 자꾸 동쪽으로 가는 과정이죠. 그런데 중국은 원래 고향으로 가고 일본은 고향에서 멀어져 갑니다.

이렇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차지한 이후 그 손자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할아버지를 워낙 존경해서 대궁전을 확장해서 참 멋지게 세웠습니다. 그게 ‘닛코(日光) 동조궁東照宮’입니다. 닛코는 일광입니다. 태양 광명, 우주의 광명이에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나를 닛코에 묻어다오’ 이렇게 유언을 해서 거기에다 사당을 지었는데, 그것을 대궁전으로 복원을 한 겁니다. 궁전을 복원할 때 만5천 명 장인과 4백5십만 명의 인력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동조궁을 가는데, 껍데기만 보고 와요. 『환단고기』의 9천 년 문화 역사가 바로 여기 닛코산, 닛코 동조궁에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용봉, 도깨비가 그냥 꽉 들어차 있어요.

왕은 허수아비이고 실제로 쇼군(將軍)이 왕 노릇을 했습니다. 이 막부에서 265년을 다스립니다.

덕천가강의 묘가 뒤에 있다고 해서 가 보았는데, 수백 년 된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계단을 타고 올라가 보니 그 산의 풍광이 정말 멋있어요. 거기에 철제를 씌워 놨는데 그게 팔각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백제에는 8대 성씨가 있고, 팔각형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 8수 문화는 우주광명의 영원불멸 신선문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금동대향로도 연꽃 문양이 3단으로 되어 있고, 그 조각된 것이 셋과 여덟으로 되어 있어요.

일본은 동경 에도시대를 열고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 이후로 자기들이 자생自生 왕조사를 씁니다. 그래서 초대 신무(神武)로부터 100대 고코마츠(後小松) 왕까지 해서 저 유명한 『대일본사』 397권을 250년 동안 써서 1906년에 완성합니다. 이때 조선은 멸망을 당했습니다. 역사의식에서 패망당한 겁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조슈 번
일본의 역사 운명은 저 유명한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군과 동군이 그 들판에서 붙었어요. 우리가 역사 답사를 가서 겨울날 찬바람을 맞으면서 세키가하라 넓은 들판에서 벌어졌던 역사 이야기를 박물관에서 자세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리 밑에 있었던 장수 하나가 배반을 했어요. 모리 테루모토라는 자가 동군과 짜고 ‘싸움에 참여하지 않을 테니까 나중에 승리를 하면 나의 거대한 영지를 보존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시에 130만 석을 추수했다고 합니다. 그랬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한 뒤에 그 영지를 몰수해 버리고 조슈(長州) 번藩 조그만 귀퉁이를 줬어요.

그래서 대대손손 원한이 축적이 되어서 나중에 조슈 번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명치유신의 주역들이 전부 여기서 나오는데, 이등박문도 여기 출신이에요. 이등박문이 영국에 유학을 갔는데, 조슈 번에서 혁명이 준비됐으니까 빨리 오라고 했어요. 그때 명치의 아버지 효명 왕을 제거하는 일을 맡아서, 어릴 때부터 궁궐에서 효명과 같이 큰 토모미와 짜고서 명치 아버지를 죽였는가 봅니다.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이등박문을 제거할 때 내세운 열 가지 죄목 가운데 하나가, ‘명치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