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 복원>가야인 들의 금속 가공 예술
<가야사 복원>가야인 들의 금속 가공 예술
■황금관과 금동관
한민족이 탄생시킨 황금관冠 10개 중 2개가 가야 황금관입니다. 신라 금관이 7개, 고구려 금관은 1개입니다. 가야 황금관 2개 중 하나는 고령에서 도굴 된 것으로 삼성 리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동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동경 박물관의 가야 금관(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라는 일본인이 수집한 금관)은 정확하게 어디에서 발견된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구라가 창녕군에서 도굴로 나온 유물들을 집중적으로 매입했기에 창녕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안타깝게도 도굴을 통해서 세상에 나온 가야 황금관들은 정확한 연대 추정도 그 소유자도 알 수 없습니다. 금속은 탄소연대 측정법이나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으로 계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같이 매장된 유물(토기나 목재 등)이 있다면 어느 정도 연대 추정이 가능한데, 도굴된 장소나 해당 고분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습니다.
가야 황금관은 신라 금관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높이가 낮고 덜 화려한 편입니다. 가야 제국마다 다른 디자인으로 계승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삼엽문 으로 구성된 고령 금관은 열매처럼 ‘굽은 옥’이 달려 있고 나뭇잎처럼 ‘달개’ 들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무늬들이 테두리를 섬세하게 꾸미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신라 금관과 다르지만 제작 기법은 거의 동일합니다. 창녕 금관은 굽은 옥이 없는 교동 금관, 호림박물관 금관, 금령총 금관과 거의 제작 기법이 유사합니다.
합천 옥전 고분에서 발견된 출出 자형 금동관은 신라의 출 자형 황금관들과 아주 유사합니다. 소재만 ‘금동’일 뿐 개략적인 디자인은 신라 황금관에 못지않습니다. 다만 5~6세기 고분에서 발견되어 신라의 영향을 받은 금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귀걸이 및 장신구
김해, 고령, 합천, 함안 등지에서 발견된 가야의 금 귀걸이나 장신구들을 보면 섬세한 세공기술에 놀라게 됩니다. 아마도 가야에는 놀라운 금속 가공 능력을 가진 장인들이 많았나 봅니다. 그들은 단순히 정교한 기술만 가진 것이 아니라 수준 높은 종교성과 철학을 작품으로 표현해 내는 천재들이었습니다.
■둥근 고리 손잡이
합천 박물관에 가 보시면 정말 예술적인 가야 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독자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환두環頭는 대표적인 한민족 검 손잡이 디자인입니다.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도검 손잡이 끝부분에는 둥근 고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아프로시압 벽화에 등장하는 새 깃털을 머리에 꽂은 이들을 고구려 사신이라고 판단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 허리에 찬 환두대도 때문입니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칼은 어떤 칼에는 둥근 고리 안에 봉황 머리가, 어떤 칼에는 봉황과 용 머리가, 어떤 칼에는 두 개의 용 머리 장식이 들어 있습니다. 봉황과 용 무늬가 손잡이 전체에 멋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고대 장인들은 어디서 이러한 영감을 얻었을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스승이나 선대 작품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분 유물은 당대 최고 권력자들이 고객입니다. 고객들은 독창적이면서 멋지고 화려한 작품을 원했습니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시대 지배층의 주류 종교, 사상, 철학, 전승되어 온 설화, 전설, 영웅담을 담기 원했습니다. 대표적인 제왕의 상징이 바로 봉황과 용입니다. 무엇보다도 한민족은 예로부터 봉황과 용을 같이 사용했습니다. 옥전 고분 환두대도에는 이러한 한민족 전통(음양오행 사상과 용봉 문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입니다. 합천 지역에 옥전 고분을 조성한 가야인들의 자부심과 기상이 어떠했는지 환두대도에 새겨진 용봉 문양으로 소리 없이 과시하는 듯합니다.
■ 미늘쇠
가야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에 가면 꼭 한 번쯤은 ‘미늘쇠’를 만나게 됩니다. 녹슨 철판 조각 같은 모습이 그다지 호감형 유물은 아닙니다. 더구나 유물을 보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감잡기 어려워 쉽게 친해지지 않습니다. 박물관에 게시된 설명문을 봐도 속시원한 설명이 없습니다. ‘미늘’이라고 하면 낚시 바늘처럼 굽은 갈고리 같은 것을 말하기도 하고, 갑옷에 다는 비늘 모양의 가죽 혹은 철 조각을 말하기도 합니다. ‘미늘쇠’ 라는 단어만 들으면 어떤 용도였는지 모호합니다. 납작한 형태의 이 철제 유물에 대해 일본인들이 붙인 한자 명칭은 유자이기有刺利器(가시가 돋친 날카로운 물건)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사람들은 기마병을 상대하는 보병의 무기쯤으로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러나 철판 두께나 장식물(회오리나 새 모양)을 볼 때 병기兵器가 주는 강인함이나 날카로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무기보다는 제의祭儀에 사용한 도구 정도로 설명합니다. 이 역시 즉흥적인 의견이라 제의에 어떻게 사용했으며, 왜 이러한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의 있고 논리적인 연구 자료조차 희박합니다.
가야 건국신화를 그려낸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미늘쇠를 깃발처럼 긴 장대 위에 꽂아서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STB상생방송에서 경주 환단고기 콘서트가 방영되었는데, 그 내용 중에 알타이 파지릭Pazyryk 고분에서 발견된 흉노 얼음공주의 관식冠飾이 소개되었습니다. 이는 새 장식 미늘쇠와 아주 유사한 모습입니다. 흉노 공주는 15마리 금 그리핀(봉황) 장식으로 꾸며진 관식을 머리에 장식하고 있습니다. 가야 강역에서 나온 작은 미늘쇠는 파지릭 고분의 공주처럼 머리에 꽂아서 사용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그러나 얼음공주의 관식보다 그 자체의 상징성에 대한 것에 더욱 관심이 생겼습니다. 회오리 모양이나 새 모양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새 장식이나 회오리 동심원 모양은 충분히 종교성을 드러낸 상징이라고 판단됩니다. 특히 새 모양 장식 미늘쇠를 환국, 배달, (고)조선으로부터 계승되는 역사 문화 유산 ‘솟대’와 연결 지어 생각해 봤습니다. 솟대란 소도蘇塗에 세우는 상징물입니다. 소도란 하늘 임금님(천제天帝, 상제上帝)께 제祭를 모시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솟대에는 새 모양 장식이 꼭대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 새는 바로 천제께 인간 세상의 소식을 전하고, 상제께서 내려 주는 메시지를 인간 세상에 퍼뜨리는 메신저Messenger를 의미합니다. 가야인들의 미늘쇠는 솟대의 변형이 아닐까 하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듭니다. 인류사에 철기 문명을 처음 열었던 히타이트인들에게 철은 종교적 예술품을 만드는 귀한 소재였습니다. 가야인들도 ‘철’을 이용하여 전통적이며 종교적인 상징물로서 미늘쇠를 만들어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미늘쇠와 솟대의 관계를 함부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좀 더 전문적인 연구와 조사를 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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