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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는/증산도가 뭐예요?

<안운산 태상종도사>증산도,2변도운의 역사적 의의

by 이세덕 2019. 4. 9.

<안운산 태상종도사>증산도,2변도운의 역사적 의의

<안운산 태상종도사>증산도,2변도운의 역사적 의의

 

 증산 상제님의 도의 역사, 즉 증산도사(甑山道史)의 핵심 맥을 보지 못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첫 교단의 개 창 과정으로부터 제3변 성숙기에 이르기까지의 중간마디를 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도사의 전체 흐름을 볼 때 2변 도운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역사의 과정으로 보면 2변 도운은 3변과 1변의 중간에 있다. 이 중간마디를 바르게 본다는 것은 머리와 꼬리, 처음과 마지막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안목을 갖는 것이다. 즉 상제님의 도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통시적인 시각을 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간마디를 보지 못하면 그 뿌리를 보지 못하고, 따라서 마지막 성숙과정도 일관된 맥으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3변 성숙과정에 있는 지금 이 시점에 강증산 상제님의 도통맥이 태모 고수부님으로부터 어떻게 전수되어 내려와서 씨를 뿌리고, 옮겨심고, 매듭짓게 되는가를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 이후 제2차 부흥시대를 준비한 고수부님이 주재하신 용화동에서의〈셋째살림의 중요성〉을 재인식해 둘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제2변 도운의 발전과정을 정확하게 짚을 수 있다는 것은 도맥의 터널을 뚫어 증산도 종통 역사의 맥을 바로잡는 하나의 열쇠를 갖는 것이다. (판 안과 판 밖 교단의 창립과 발전사는 앞으로 통합적 시각에서 도성덕립의 새로운 역사관으로 기록될 것이다)

제2변 도운시대에 고수부님이 점지해 주신 용화동에서 상제님의 진리를 받들며 신앙했을 때의 교단 이름은〈증산교〉였다. 처음에는〈대법사 증산교〉라고 하였으나 보통〈증산교〉라고 ‘교(敎)’자를 사용했다. 그 당시에 증산도에 대한 민중의 역사의식이 그 정도밖에는 안되었던 것이다. 또 그것을 알고 있다하여 난세인 세운의 형편상 세상 사람들이 ‘도(道)’를 잘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도장(道場)〉이라고 써 붙이면 아침 일찍 츄리닝을 입고 와서 "얼마요?” 하고 묻는다. 주먹질을 하고 역기를 드는 곳 정도로 아는 것이다. 도장이라 하면 도를 닦는 곳, 마음닦는 곳으로 알지 않고 육체를 단련하는 체육관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3변 교운의 개창 초기에도 한때는〈증산교〉라고 했던 것이다. 시대적 여건이 성숙된 진리인 증산도 무극대도를 받아들일 만한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중용『中庸』에서는 성性과 도道와 교敎의 차이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요 - 하늘이 명하신 것이 본성이며,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요 - 그 본성을 잘 기르고 간직하는 것이 도요,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니라 - 그 도(길)를 닦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 교화이니라 『중용』


⇒교화를 통해서 도를 체득하고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도道는 진리 자체이다. 노자는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했다. 상제님 진리는 자연섭리고 자연섭리가 상제님 진리다. 사람이 되려면 사람이 되는 보증, 도장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유가에는 인印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해서 하느님이 명한 조화의 정신자리, 하늘이 내려준 마음자리를 본성이라 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人法地, 地法天,天法道, 道法自然。『도덕경』25장)

 

여기서 ‘도법자연道法自然’의 뜻은, 우주 변화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스스로 그러한 천지의 변화 법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여기에는 천지가 걸어가는 변화의 길[道]은 스스로 그렇게만 돌아가는 우주 자연의 질서[理] 그대로 담겨 있으므로, 인류의 미래 운명을 알려면 우주 변화의 원리[道]를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면 2변 도운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안고 있는가? 우선 1변 도운 시대 판 안의 난법기운을 해소하고 정화하는 과정으로서 또 한 차례 (2변)의 난법(과도기 도운)이 필요했다.

 

을유해방 이후에도 판 안의 난법 주역자나 판 밖의 난법 주역자, 즉 상제님의 성도들 가운데도 생존한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상제님의 성도들을 통해 상제님의 혈족과 직접 간접으로 인간관계를 맺고 새로운 판 밖의 교단을 연 주역자들도 아직 생생히 살아 있었다. 그러므로 고수부님이 말씀하신 ‘추수할 인물’이 나와도 이러한 인물들과 한 판의 게임을 해야 한다. 왜? 그것은 난법을 또 한 번 마무리지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역사의 현실인 것이다. 상제님 천지공사는 인사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연출하는 역사의 현실 속에서 도운공사가 전개되면서 성사재인의 총체적 역사의식이 열려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상제님께서는 ‘가구 진주치기 노름’으로 비유하셨다. 이러한 난법에서 진법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궁극의 목적인 진법도운의 도성덕립과 후천선경이 열려 나가는 것이다.

 

●“현하대세가 가구(假九)판 노름과 같으니 같은 끗수에 말수가 먹느니라.” 하시고 “그 때는 무위이화로 내 일이 이루어지리니 갑오갑자(甲午甲子)꼬리니라. 갑자꼬리로 종장(終章)을 짓느니라.” 하시니라(도전5:357)
 

●상제님께서 평소 성도들과 노실 적에 종종 ‘가구(假九) 진주(眞主)치기 노름’을 하시니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다 터라.” 하시고 투전을 들고 탁 치시며 “○씨가 판을 쳤다!” 하시고 다 거두어들이시며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다 죽는다. 잘못하다가는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란 말이니라. 알겠느냐?
도로 본자리에 떨어진단 말이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르니 봉사 잔치란 말이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누가 가르쳐 주랴. 제가 알아야 하느니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끝판에 ○씨가 있는 줄 몰랐지. 판 안 끗수 소용 있나. 끝판에 ○씨가 나오니 그만이로구나.
나의 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라. 나의 일은 판밖에 있단 말이다. 붉은 닭 소리치고 판밖 소식 들어와야 도통판을 알게 되고, 도통판이 들어와야 나의 일이 될 것이다.” 하시니라.(도전6:74)

종국적으로 보면 진리 문제는 인사의 문제다. 어떤 인물이 진리 주인으로 서냐에 따라서 진법과 난법으로 판이 갈리게 된다. 심법이 바르면 진법이 열리고 심법이 그르면 난법이 열린다.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진리의 주인인 상제님이 인간 세상에 강세하시면서 진법(眞法)시대가 열려나가게 된 것이다. 선천 역사의 전 과정이 이런 면에서 본다면 난법에서 진법을 향해 가는 과정이다. 그러면 선천 종교는 진법인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전 면목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난법의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의 이치를 깨달은 자를 성인이라 하느니라.
만법이 머무는 법이 없거늘 내가 낸 이 법이 진법(眞法)이라는 말이니라. 알아듣겠느냐? 그러므로 ‘성인의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하느니라.” 하시니라.(도전2:132)

 

상제님께서는 그 진법을 여는 주인공이 나오는 과정을 종통공사를 통해 처결하셨고, 그 종통 전수자를 진주(眞主)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진주가 결국 의통성업 천하통일의 주인인 천자(天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진주가 여는 판이 진법판(眞法板)이 되는 것이며, 진법판에서 도성덕립이 되도록 판을 짜신 것이다. 난법을 제대로 알아야 진법을 열 수 있다.

상제님 천지공사는 종통자인 진주를 기르고 역사의 중심에 내세우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난법 과정에서 일어난 난법형국, 모든 문제들을 몸으로 체득해서 마지막 추수도운인 3변 도운 상씨름판으로 뛰어 들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고, 서양에 가 있던 조선의 조상신들이 돌아와서 제 집 일은 다시 제가 주장하는, 즉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정상화 되어가는 국운이지만, 그 국운도 사실은 아직 과도기였다. 정부수립도 못하고 좌파 우파로 나뉘어 우왕좌왕하며 머리터지게 싸움질하고, 그러다가 대전쟁이 터지는, 세운 자체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진주(眞主)와 진법도운(眞法道運)이 자리잡기 위한 새로운 난법 과정이었던 것이다.

『관통증산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