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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잊혀진 역사

<전명숙 장군>갑오동학농민혁명

by 이세덕 2019. 6. 5.

<전명숙 장군>갑오동학농민혁명
<전명숙 장군>갑오동학농민혁명

 

“전명숙(全明淑)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지고 상민(常民)들의 천한 신분을 풀어 주고자 하여 모든 신명들이 이를 가상히 여겼느니라. 전명숙은 만고(萬古)의 명장(名將)이니라. 벼슬 없는 가난한 선비로 일어나 천하의 난을 동(動)케 한 자는 만고에 오직 전명숙 한 사람뿐이니라.”
- 도전 4편 11장

옆 사진은 전봉준全琫準(전명숙全明叔) 장군을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시점은 1895년 2월 27일 (이하 양력)이고 장소는 서울이다. 서울의 일본 영사관에 갇혀 있던 전 장군이 심문을 받기 위해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이송되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한다. 압송에 참여한 일꾼들의 심드렁한 표정에서 이번 행차가 여러 번 반복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에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들이 아직 겨울 추위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실패한 거사의 모든 책임을 지는 패장이건만 그의 기상은 여전히 세상을 뒤흔드는 혁명가의 그것이다. 아직 체념하기에는 분노가 너무 컸을까. 아마도 참혹하게 죽어간 동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부족에 대한 한스러움도 되씹고 있었으리라. 혹시 몰락해 가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선천 상극의 세상, 모든 것이 삐뚤어질 수밖에 없는 천도 섭리를 원망하고 있었다면 너무 사치스런 추측일까?

 

1894 갑오년의 동학농민전쟁, 아마도 근대사에 이 사건만큼 우리 민족에게 절망감을 안겨 준 비극도 없을 것이다. 동학은 1870년대 후반부터 경상·충청·전라의 삼남 지방에 뿌리를 내렸다. 열강들의 침입, 중앙 정부와 지방 수령의 탐학으로 조성된 불안하고 원망 어린 사회 배경을 타고 동학은 농촌과 지식인들에게 빠른 속도로 퍼져 갔다. 종교 운동으로 시작한 동학이 사회 변혁 운동으로 돌변하도록 불을 놓은 인물은 단연 탐관의 대명사 고부 군수 조병갑이다.

 

1894년 2월 전봉준은 1천의 농민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아전들을 처단하고 양곡을 몰수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사실상 혁명의 시작이었다. 잠시 진정되는 듯했던 혁명은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으로 다시 폭발했다.

 

1894년 4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든 농민군들은 이후 황토고개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인근 고을을 점령해 나갔다. 5월에 전주 감영을 점령하고 6월 초순에는 전라도 일대가 사실상 농민군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정부와 농민군은 휴전 교섭을 벌여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다. 대부분의 농민군들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국제 정세는 점점 불안하게 꼬이고 있었다. 청군이 아산만을 통해 들어오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일본군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청·일 양국군의 대치 상태는 드디어 7월 25일 전쟁으로 비화됐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과 부당한 내정 간섭에 분개한 농민군은 이해 10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했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反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남접과 북접의 연합으로 수십만으로 불어난 농민군은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 우금치에 이르렀다. 약 1주일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곳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처절한 패배를 당한다. 이후 농민군들은 일본군과 관군 연합에 쫓겨 금구, 원평으로 후퇴했다.

 

국토의 구석으로 내몰린 생존 병력은 일·관군의 소탕 작전에 지리멸렬하게 되고 결국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된다. 1895년 4월 23일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년 41세의 젊은 나이였다. 한때 60만에 달했던 동학농민군들 중 30만이 무참하게 학살당하면서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동학농민군들은 애국적이고 애족적인 동기에서 거사했지만 당시의 시대 과제를 이해하지 못했고 혁명 전략도 정확하게 세우지 못했다. 결국 외세의 개입과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예정된 실패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일찍이 동학은 1860 경신년 4월 초 5일 경주 사람 최제우 선생이 천상의 상제님과 문답을 통해 도통을 받고 창시하였다. 이후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는 그의 외침은 민초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다시 개벽’ 사상으로 세상의 변혁을 꿈꿨고, ‘무극대도’가 다스리는 ‘오만 년’ 조화 세상을 염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동학의 핵심에는 ‘시천주侍天主’가 있다. ‘인간으로 오시는 천주님을 모신다’는 이 메시지는 너무나 큰 파격이기에 오히려 민중들의 의식에 접속되지 못했다.

 

천주님이 누구신지, 천주님은 언제 어디로 오시는지, 왜 천주님이 오셔야만 하는지 등 천주에 대한 많은 담론들이 문화 운동으로 채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천주에 대한 이해 부족은 이후 전개된 동학 운동의 치명적 한계였다.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께서는 “원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하였으나 때가 때인 만큼 안으로는 불량하고 겉으로만 꾸며대는 일이 되고 말았나니 다만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못함이라.

(도전5:205)”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상제님은 전명숙 장군의 정신만은 높이 평가하셨다. 동서양 창업군주와 명장들의 반열에서 전명숙을 제일 첫머리에 놓으신 것이다. 또 그를 천상 조화정부造化政府의 조선 명부대왕冥府大王에 임명하시어 신명으로나마 후천 선경 건설에 역사하게 하셨다. 상제님은 그가 잡힌 피노리에 직접 가시어 사명기司命旗를 세워 그의 한을 풀어 주셨다. 사명기는 임금이 각 영營의 대장에게 내리는 지휘기다.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왕정王政을 바로 세우고자 거사한 그에게 왕의 신임을 상징하는 사명기가 없는 것은 천추의 한이었다. 상제님께서 직접 사명기를 꽂아 주심으로써 동학혁명은 상제님의 천명으로 후천개벽의 문을 열어 놓은, 천도혁명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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