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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잊혀진 역사

<을미사변>을미사변,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by 이세덕 2019. 6. 24.

<을미사변>을미사변,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을미사변>을미사변,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을미사변(1895년)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이었나니 배은망덕(背恩忘德)은 신도(神道)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저희들에게 일시의 영유(領有)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하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도전 5편 118장


작전명 ‘여우사냥’이 시작됐다. 1895년 10월8일(음력 8월20일) 새벽 5시경 광화문 앞에 일단의 일본인 낭인浪人들이 일본군 수비대, 조선 훈련대와 함께 도착했다. 이들은 이미 새벽 3시경 공덕리孔德里의 별장(아소정我笑亭)에 유폐되어 있던 대원군을 강제로 끌어내어 궁으로 향했다. 대원군과 훈련대를 끌어들인 것은 향후 사건을 조선인들에 의한 반란으로 조작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들이 노리던 목표는 조선의 왕비 민씨(사후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로 추존, 이하 ‘황후’로 칭함)였다. 사건은 이미 오래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부부는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일본을 다녀온 후 왕궁을 방문하여 조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9천 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고종과 황후에게 바쳤다. 일본에 대한 고종과 황후의 경계심을 풀기 위한 계산된 연극인 셈이다. 또한 일본은 고무라의 딸을 황후의 양녀로 들여보냈는데 이는 황후의 얼굴과 궁궐의 지리를 익히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황후 시해 계획을 세운 이노우에는 사건 발발 20일 전에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를 대신하여 이노우에가 추천한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 梧楼)가 1895년 9월 1일 부임했다. 행동 대장 이노우에의 주도하에 10월 3일 공사관 밀실에서 을미지변乙未之變의 구체적 실행을 위한 모의가 이뤄졌다.

 

낭인 일행이 도착하자, 광화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는 경비병과 순검들의 저항을 가볍게 제압했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은 함성을 지르며 북쪽의 건청궁乾淸宮을 향해 돌진했다. 궁을 지키던 300~400명의 시위대가 총격전을 벌였으나, 이미 갑오경장 때 우수한 무기를 빼앗겨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흉도들은 건청궁까지 오자 대오를 정렬하여 합문을 포위하고 파수를 보았으며, 낭인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흉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고 윽박질렀다. 마침내 건청궁의 안채 곤녕합坤寧閤에서 황후를 찾아냈다. 흉도들은 황후를 내동댕이친 후 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칼로 찔렀다. 흉도들은 자신들이 죽인 여인이 황후라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여 황후와 비슷한 용모의 세 궁녀들도 살해했다. 이들은 이미 황후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여러 장 들고 있었고, 나중에는 고무라의 딸을 대동하여 황후인지를 확인하였다. 그것도 미심하여 최종적으로 태자를 불러 황후의 죽음을 확인했다. 「고종실록」에는 황후가 죽은 시각은 묘시卯時라고 되어 있다. 대략 새벽 6시경이었다고 한다. 황후의 시신은 그날 아침 궁에 들어온 미우라 공사에 의해 재확인되고, 그의 지시에 의해 화장되었다. 아예 증거를 인멸하기 위함이다. 흉도들은 시신을 문짝 위에 올려놓고 이불을 덮어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숲 속으로 운반한 다음 장작더미에 옮겨 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타다 남은 유골은 날이 밝은 뒤 훈련대장 우범선이 궁궐을 순시하다가 발견하여 연못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어떤 일본 측 보고서에 의하면 흉도들은 황후의 시신에 능욕을 가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고종은 흉도들의 주의를 따돌려 황후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흉도들이 잘 보이는 방 문 앞에 나와 서 있었는데, 흉도들은 칼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는 수모를 당했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우리 할아버지 대에 나라의 국모가 살해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인류 역사를 전쟁이 반복되어 온 ‘피의 목욕탕’이라고 한다지만 일본이 저지른 을미년의 만행은 동서고금에 그 유사 사례를 찾기 힘들다. 국가 간에도 도덕률이 존재한다면 일본의 범죄는 배은망덕의 극치에 해당한다. 일본이 이렇게 대담한 사건을 저지른 배경은 무엇일까?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승리하여 청의 요동반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895년 4월 일본의 중국 진출을 우려한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일본에 압력을 넣어(삼국간섭)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한다. 이를 지켜본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할 대안 세력으로 러시아를 선택하고 이해 8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 친러 정책을 추진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공들인 조선을 자칫 러시아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속에 폭력으로 정국을 뒤집어 놓기 위해 직접 황후를 시해하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을미사변을 조선인의 소행으로 돌리려던 일본의 흉계는 실패하고, 국내외의 거센 반발에 부닥친 일본은 미우라 공사와 스기무라 서기관 등 사건에 개입한 일본인 47명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음 해 1월에 증거불충분의 이유로 석방된다. 을미사변 이후 친일 세력이 주도한 김홍집 내각이 구성되고 을미개혁乙未改革이 실행된다. 태양력太陽曆 사용, 단발령斷髮令 등이 이때 공포됐다. 국모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만행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전국 각처에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다음 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俄館播遷)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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