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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잊혀진 역사

<볼셰비키 혁명>러시아 10월혁명

by 이세덕 2019. 6. 24.


<볼셰비키 혁명>러시아 10월혁명
<볼셰비키 혁명>러시아 10월혁명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하루는 백남신과 함께 전주 남문 누각에 오르시어 글 한 장을 써서 불사르신 뒤에 한동안 누군가를 기다리시다가 다시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잠시 후 또 한 장의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옥골선풍의 한 아름다운 청년이 상제님 앞에 이르러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살려 주시기를 빌거늘 상제님께서 벼락같이 호통치시며 “한 번 부르면 올 것이지 어찌 세 번 만에 오느냐!” 하시고 붓에 먹을 묻혀 양미간에 점을 찍으시니 그 청년이 곧 물러가니라. 그 뒤에 김갑칠이 전주 서천교(西川橋) 다릿목을 지나면서 보니 한 옥골선풍 청년이 죽어 있는지라 상제님께 와서 그 사실을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그는 북학주(北學主)로서 무고한 창생을 무수히 살해할 자라. 그러므로 천도(天道)에서 벌을 받음이니라.” 하시니라.
(도전 5편 387장)

 

레닌이 타고 온 혁명 열차

레닌 그가 왔다. 1907년 4월 16일, 10년의 세월 동안 해외 망명지를 떠돌며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꿈을 키워 온 그가 페트로그라드(이후 ‘레닌그라드’를 거쳐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이 바뀜)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등장 과정도 극적이었다. 시작은 1917년 4월 9일의 스위스 취리히 중앙역이다. 1년여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레닌과 그의 동료들 32명이 기차 여행에 나섰다. 여정은 스위스-독일-스웨덴-핀란드를 거쳐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가는 3,200km의 대장정이다.

1917년은 제1차 세계대전 3년째인 해다. 승전보는 러시아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 대신 식량 부족과 연료 부족은 일상사가 됐고 파업과 시위는 갈수록 규모가 커져 갔다. 하지만 차르는 개혁을 거부했고 결국 대규모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른바 2월 혁명이다. 이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300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이후 들어선 임시정부는 공화정으로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노동당의 멘셰비키가 주도했다.

독일은 전쟁 반대론자 레닌을 이용했다. 독일은 ‘레닌의 귀국…임시정부 혼란…러시아의 동부 전선 이탈…독일은 서부 전선에 집중’하려는 계산이었다. 스위스 취리히를 출발한 열차가 독일 땅 고트마팅겐역에 도착하자 독일은 그들에게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봉인열차(Sealed train)' 한 량을 제공했다. 독일 땅을 종단한 봉인열차는 항구도시 자스니츠에서 종료되었다. 일행은 뱃길로 바다를 건너 4시간 만에 스웨덴의 말뫼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북행 열차를 탔다. 이틀 만에 도착한 곳은 스웨덴 최북단 도시 하파란드. 이들은 마차 썰매를 타고 쌍둥이 마을인 핀란드의 토르니오로 넘어갔다.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의 자치령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남행 열차다. 293호 기관차가 주어졌다. 열차는 하루를 꼬박 세우고 그 다음 날 4월 16일 밤 11시에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레닌의 10년 망명 세월이 종료된 것이다. 역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노동자, 군인, 볼셰비키들이 몰려와서 “레닌!”을 외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레닌이 역 앞 장갑차에 올랐다. “약탈적인 제국주의 전쟁은 전 유럽 내전의 시작이다. …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 만세!” 그의 연설은 그의 불우한 인생 역정과 겹쳐져 선명하게 대중에게 다가왔다.


10월 혁명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 탄생

레닌은 볼세비키 본부에서 ‘4월 테제’를 내놓았다. 그 내용은 ‘부르주아적 영향력(멘셰비키) 제거, 임시정부 타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즉각 결행’이다. 역사의 격랑이 계속됐지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치며 혁명을 주도한 레닌의 의지대로 흘러갔다. 드디어 10월 25일(러시아 율리우스력, 현재의 태양력으로는 11월 7일), 볼셰비키 군사위원장 트로츠키는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1,000명의 적위대가 임시정부 거점이던 겨울궁전을 점령했다. 이제 혁명 권력은 급진 계급 혁명을 주장하던 볼셰비키에게 넘어갔다.

볼셰비키는 10월 혁명 직후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실험에 들어갔다. 모든 토지와 은행을 국유화하고 개인 금융 계좌와 교회 재산은 전액 국가가 몰수했다. 노동자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시간은 8시간으로 줄였다. 사적 소유를 없애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한 뒤 중앙 계획 경제체제를 가동했다. 모든 권력은 노동자, 농민, 군인의 대표자로 구성된 소비에트에 귀속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현실 역사에 실현한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것은 세계사적인 대사건이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이 러시아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로 파급됐기 때문이다.

 


세계로 수출된 사회주의 혁명
소련은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Comintern을 통해 중국 등에 조직적으로 혁명을 수출했다. 1921년 7월 천두슈(陳獨秀)·리다자오(李大釗)·마오쩌둥(毛澤東) 등이 상해에서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중국 공산당을 창당했다. 초기 혁명 과정은 코민테른이 파견한 파벨 미프가 지도했다.

소련은 2차 대전에서 나치의 침략을 물리친 뒤 유럽 중동부 지역에 사회주의 위성국가를 세우고 냉전 시대를 열었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대신 모든 사람을 고용하고 평등 분배를 하겠다는 사회주의자들의 공약은 특히 사회적 약자, 빈자들을 매료시키면서 10월 혁명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 갔다. 남북 분단과 6.25전쟁이라는 한민족의 비극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이 게릴라 활동 끝에 1959년 미주 대륙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 역사 실험

상점 앞에 선 긴 줄, 암시장 등은 사회주의 경제를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사유재산 철폐, 가격통제, 중앙 계획 경제체제는 결국 인간의 자발성을 억눌렀기 때문에 오히려 경제를 망치는 구조적 모순으로 작용했다.

정치에서도 사회주의 정권은 공포정치와 동의어가 됐다. 10월 혁명 직후 1917년 12월 레닌은 체제 수호를 위해 비밀경찰인 체카를 창설했다. 이 조직은 국가정치총국(GPU)-내무인민위원회(NKVD)-국가보안위원회(KGB)로 이름을 바꾸면서 사회주의 독재 유지의 선봉이 되었다. NKVD는 스탈린 시절인 1937~1938년의 피의 대숙청을 주도하면서 공식 통계로 68만 명을 처형했다. 실제론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반대파와 불순 세력에 대한 피의 숙청은 거의 대부분 사회주의 나라에서 일어났다. 그 압권은 동남아시아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킬링필드killing field다. 무장 조직 크메르루주가 1967년~1975년에 걸쳐 24만~30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내전 끝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이후 그들은 혁명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계층의 사람들 최대 200만 명을 학살했다. 이들은 1993년 몰락했지만 킬링필드는 홀로코스트에 버금가는 대학살로 인류사에 상처를 남겼다.

결국 1980년대 후반부터 사회주의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1989년 폴란드를 시작으로 동구권의 모든 나라들이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탈했고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종주국 러시아마저도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이로써 1917년 10월 혁명에서 1991년 러시아 공화정 선포까지 74년간의 사회주의 역사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이제 대부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는 사라졌다. 현재 중국·쿠바·베트남·라오스 4개국만 헌법에 이를 명문화하고 있을 뿐이다. 일당독재에 세습까지 하고 있는 북한은 2009년 헌법에서 ‘사회주의’를 빼고 대신 김일성, 김정일 사상을 앞세웠다. 중국의 경우 경제는 시장경제, 정치는 공산당 일당독재를 추구하는 형태다. 종주국 러시아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허망한 최후를 고려하면 인류는 10월 혁명으로 너무나 엄청난 피의 희생을 치렀다.


마르크스주의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존엄을 교환가치로 녹여 버렸고, 인간의 자유를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거래의 자유로 대체했다.”
“노동자는 분업과 기계화로 말미암아 이제 단순한 도구나 부품이 되었고 매시간 감독하는 관리자, 사용주, 부르주아, 그리고 그 국가의 노예가 되었다.”
“노동계급 혁명의 첫걸음은 노동계급이 지배력을 장악해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 「공산당 선언」중에서

마르크스는 역사가 원시시대-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완전한 이상사회)의 순서로 진보한다고 믿었으며 이것이 과학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각 사회에서 다음 단계의 사회로 진보하기 위한 동력은 계급투쟁을 기반으로 한 혁명이라는 설명이다. 자본주의 시대가 오려면 봉건제 사회가 부르주아 혁명으로 타파되어야 하고 이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되어야만 부르주아(자본가 계급)에 대항하여 노동자(프롤레타리아)들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는 사회주의 시대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생산수단을 독점한다. 이 시기는 최종 이상 사회인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점을 끝내고 생산수단을 완전히 공유하게 되면, 완전한 무계급 사회인 공산주의의 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볼셰비키Bolsheviki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두 파로 분열될 때, 레닌이 이끄는 좌익의 다수파를 일컫는 말이다. 1918년 7회 대회에서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고친 뒤부터 볼셰비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멘셰비키Mensheviki
러시아어로 소수파少數派라는 뜻이다. 1903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다수파)와 대립하던 소수파를 말한다. 부르주아지와의 협조를 중시했고 무장봉기를 부정했다.

소비에트Soviet
러시아어로 평의회 또는 대표자 회의를 뜻하는 단어. 그러나 이후 러시아 혁명 때 노동자·병사 등의 대의원인 소비에트 기관이 창설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의회에 대비되는 개념이자, 민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의 권력 기관이란 의미로 전용되었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후천세계

“앞으로는 중천신에게 복록을 맡겨 고루 나누어 주게 하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앞세상에는 공덕(功德)에 따라서 그 사람의 복록이 정하여지나니 치우침과 사(私)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9편 143장)


상제님께서는 “오선위기五仙圍棋로 천하의 시비를 끄른다”(4편 19장)고 하셨다. 오선위기의 세계 정치질서는 이념의 대결장이다. 이것은 곧 이념의 해원이자 역사실험이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자본주의 시스템 역시 부의 집중과 투기를 조장해 빈부의 격차와 계층 간의 갈등을 확대하는 등 모순과 부조리를 안고 있다. 결국 온 인류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정의로운 이상 세계는 개벽 뒤에 열리는 후천 세상에서 비로소 건설된다. 상제님께서는 장차 지구촌의 녹을 고르게 분배해 창생의 삶을 평등하게 하는 후천의 복록소 도수를 보셨다. (『증산도의 진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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