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북콘서트>신교를 뿌리내린 백제의 문화 역사정신
<환단고기 북콘서트>신교를 뿌리내린 백제의 문화 역사정신
백제 왕조 성립사
백제 왕조 역사의 성립을 한번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백제 왕조 성립사에서 그 시조는 형인 비류沸流와 그 아우인 온조溫祚입니다. 온조가 한성, 지금의 서울에서 백제를 건국하고 약 5백 년간 한성 백제 시대를 계속하다가, 고구려에게 공격을 당해서 웅진熊津(공주)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백제 시조 온조는 본래 그 아버지가 고주몽高朱蒙 아니에요? 『삼국사기』에서는 비류와 온조를, 고주몽이 부여 왕의 딸과 혼인해서 낳은 아들이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다른 설을 소개하여, 과부가 된, 대상大商 연타발延陁勃의 딸 소서노召西弩가 북부여 왕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결혼해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온조를 우태의 아들로 기록하여 백제 건국자가 고주몽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한 것은 천륜을 깬 것입니다. 『삼국사기』는 신라는 종통으로 갖다 놓기 위해서 모든 게 신라사 중심으로 기록되었어요. 그래서 고구려 역사도 비하해서, 중국에 붙어먹으려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황제국 고구려를 모독하는 망발을 했어요. 대진국大震國(발해) 역사는 전혀 기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백제 시조를 고구려와 단절시켜 백제를 폄하한 것을, 『환단고기』가 체계적으로 잡아주고 있습니다.
고구려 창업사의 숨은 진실
이 고주몽은 누구인가? 고주몽은 임인년 5월 5일 날 태어나셨는데, 서기전 79년이죠. 고주몽의 혈통의 비밀, 그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은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만 나옵니다.
해모수解慕漱의 아들 모수리慕漱離는 북부여 2세 단군입니다. 그런데 해모수의 작은아들 고진高辰이 위만과 싸워 공을 세워서 고구려 제후, 지방 왕이 되었어요. 이 고진의 아들 이름은 빠져 있고, 그 손자가 불리지弗離支입니다. 이 불리지가 압록강 쪽에서 아름다운 한 여인, 유화柳花 부인을 우연히 만나서 고주몽을 낳았습니다.
유화 부인의 아버지는 하백河伯인데, 하백은 원래 천신을 숭배하고 물을 다스리는 신이었습니다. 단군조선 때부터 왕비가 이 하백에서 나왔어요. 환웅천황 때는 왕비들이 웅녀熊女 집안에서 나왔어요. 홍산문화에서 웅족(bear clan)은, 곰을 수호신으로 섬기는데, 인디언 문화에서도 곰들이 북두칠성 형상으로 행진하는 모습이 있었죠. 그 웅족, 신성神聖 민족은 방대한 시베리아 전역에도 많습니다.
이 고주몽의 어머니가 집에서 쫓겨나서, 동부여 왕 밑에 가서 아이를 길렀어요. 그런데 고주몽의 아버지가 해모수로 왜곡되어 있어요. 북부여 건국자 해모수는 고주몽의 고조할아버지입니다. 도통한 안함로安含老가 쓴 『삼성기』 상편을 보면 마지막 문장이 바로 “사해모수祠解慕漱 위태조爲太祖”, 해모수를 태조로 삼아서 제사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나라를 창건한 시조가 태조太祖입니다. 이 우주의 창업의 역사를 여는 진정한 도통군자는 태일太一 인간이에요. 이 태일이 될 때, 궁극으로 인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진리의 저 우주 바다, 조화 바다로 넘어갑니다. 우리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 몸을 받아가지고 이 순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주몽이 해모수를 태조로 삼아서 제사를 지냈으니까, ‘내가 세운 이 나라의 실제 시조 할아버지는 해모수다’ 이겁니다. 그러면 역사가 어떻게 잘못됐느냐? 지금 우리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는 북부여와 동부여가 비벼져 있고, 고주몽의 아버지가 해모수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단군조선 말기에 중국의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이 동북아를 진정으로 대통일하는 진명천자眞命天子, 천지의 궁극의 진명을 받은 천자가 될 야망을 갖고, 북쪽 흉노를 핑계대고 쳐들어왔는데 그때 나라가 진정 멸망당할 위기에 누가 일어났느냐? 북방의 이순신 장군 같은 고두막한高豆莫汗이라는 서압록 사람이 일어났어요. 아마 이 양반도 북부여 왕족 계통 인 것 같은데 한무제를 몰아내고서, 북부여 5세 단군으로 즉위하려는 해부루解夫婁에게 보좌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쫓겨난 해부루는,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동쪽에 가섭원迦葉原이 있는데 아주 자연 환경이 좋습니다. 그쪽으로 가시죠’ 해서 나라를 옮겨서 동부여라 했습니다. 수도가 가섭원이니까 가섭원 부여라고도 하죠. 이 북부여와 동부여, 가섭원 부여의 역사를 완전 복원한 분이 바로 이 호남 전라도 나주羅州에서 오신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樟입니다.
이분이 『진역유기震域留記』를 쓴 이명李茗과, 여섯 분 임금을 모신 고려 말 공민왕 때 재상을 지낸 이암李嵒과 더불어서, 9천 년 역사의 문서를 종합해서 경기도 천보산天寶山 암자에서 인재를 기다리던 소전거사素佺居士에게서 고기록을 전수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 분이 우리 역사를 복원을 하기로 결의혈맹을 했어요.
소전거사는 인류 창세 문화 역사를 복원한 아주 중심적인 인물입니다. 이분들을 도성덕립이 되면 대왕님으로 받들어 드려야겠다고 기도를 하고 있어요.
이 고주몽의 역사를 우리가 정리해 보면, 당대 신라의 천재 최고운(崔孤雲, 857∼?)이 당나라에 가서 충격 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구려 역사는 9백 년 역사라는 것입니다. 중국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되어 있는데, 가언충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말하기를 “예전부터 고구려는 9백 년을 넘지 못하고 우리나라 노장老將에게 멸망당한다고 했습니다.”라고 했어요. ‘고구려는 9백 년이다’ 이겁니다.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 이야기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크다가 예씨禮氏 부인을 맞이해 가지고 거기서 아들을 하나 낳았어요. 이 아들이 유리琉璃 태자로서 훗날 고구려 2세 황제가 됩니다. 고주몽이 동부여를 떠날 때, 칼을 부러뜨려서 유리에게 주면서, ‘나중에 나를 찾아오면 너를 태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동부여의 대소帶素와 그 측근들이, 주몽이 활을 잘 쏘고 인물이 비범하므로 왕권을 뺏길까 봐 죽이려 하자, 달아나면서 엄리대수, 송화강松花江을 건널 때 자라가 다리를 놓아줬다는 이야기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에도 있습니다.
고주몽이 북부여를 찾아갔는데, 그때는 북부여 5세 단군 고두막高豆莫을 이어서 그 아들이 6세 고무서高無胥 단군이었어요. 고무서 단군은 딸밖에 못 낳아서 대가 거기서 끊어지는데, 고주몽이 고무서 단군의 둘째 딸 소서노召西弩를 맞이해서 사위가 되어 북부여를 계승했습니다. 이것은 고구려 역사의 비밀인데, 오직 『환단고기』에 실려 있고, 역사의 유물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나와 있습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이렇게 나옵니다. “아시황천지자我是皇天之子”,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다. 삼신상제님의 아들이다’ 이런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환지십칠세손還至十七世孫”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대대로 왕위를 계승해서 17세를 내려와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광개토廣開土, 널리 영토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아버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 이 비석을 세웠는데, ‘우리 아버지 광개토호태열제, 광개토대왕님은 원 창업 시조로부터 17세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고주몽으로부터 치면 13세손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네 분이 빠진 겁니다. 지금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그렇게밖에 안 돼요.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해모수가 있고, 그 아들 고진이 있고, 고진의 손자 불리지가 있고, 거기서 고주몽이 나왔으니 해모수의 17세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 비문이 바로 고구려 건국 9백 년 역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북부여 6세 고무서 단군의 사위 고주몽은 스물한 살 되던 해, 서기전 BC 58년에 북부여 단군을 계승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42세 되던 해, 서기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바꾸었습니다.
신교문화를 도통한 고주몽 성제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고구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환단고기』를 보면, 자기들의 태조 할아버지 해모수의 고향 땅 이름이 고구려라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대백제국의 역사 정신입니다. 백제국 역사의 실체, 그 문화 정신의 위대함을 깨치려면 백제 시조 온조의 아버지와, 동방의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한 어머니 소서노, 특히 아버지 고주몽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아야 합니다. 고주몽, 이분은 신교문화를 대도통한 성인 제왕입니다.
잠깐 고주몽 성제의 유훈遺訓을 한번 들어볼까요?
“『대변경大辯經』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주몽 성제께서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리셨다.
하늘의 신(삼신)이 만인을 한 모습으로 창조하고 삼진三眞을 고르게 부여하셨느니라. 이에 사람은 하늘을 대행하여 능히 이 세상에 서게 되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태어나신 천제(상제님)의 아들[天帝之子]이 아니더냐!
슬기로운 이는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며 계율을 잘 지켜 삿된 기운을 영원히 끊나니,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하면 저절로 세상 사람과 더불어 매사에 올바르게 행동하게 되느니라. 군사를 쓰는 것은 침략을 막기 위함이며, 형벌의 집행은 죄악을 뿌리 뽑기 위함이니라.
그런고로 마음을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함이 생겨나고, 고요함이 지극하면 지혜가 충만하고,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높아지느니라. 따라서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리를 판단하고, 지혜로 만물을 다스리고, 덕으로 사람을 건지느니라.
이것이 곧 신시 배달 시대에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의 마음을 연 교화의 방도이니, 천신을 위해 본성을 환히 밝히고, 뭇 창생을 위해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 공덕을 완수하고, 천하 만세를 위해 지혜와 생명을 함께 닦아[智生雙修] 교화를 이루느니라.”
고주몽 성제의 이 유훈을 읽다 보면 그 내용이 모든 종교의 성자들의 가르침 못지않고, 어떻게 보면 그보다 더 근원적이기 때문에 놀랍기도 합니다. ‘이게 조작된 문서가 아닐까? 그러면 조작을 한 그 사람은 공자·석가·예수보다 더 위대하냐?’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조작된 것이라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훈을 보면, 아주 심원한 깨달음의 도통 경계에서 전하는 우리 역사 문화의 근본 주제, 인간의 창조론에 대해서 ‘균부삼진#均賦三眞’, ‘하늘이 고르게 만인에게 한 가지 상으로 삼진을 부여하셨다’고 했습니다. 세 가지 참된 것을 조물주의 그 신성과 광명, 우주의 지혜를 고르게 다 주셨다는 겁니다.
우리들 내면에서는 우주의 조물주의 삼신이 100%, 순도 100% 그대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위대하며 이토록 숭고한 존재란 말입니다. 인간은 영원의 생명, 불멸의 생명을 담고 있는 지존의 신비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부여’라는 나라의 계보
우리가 북부여의 역사를 놓고 보면, ‘부여夫餘’라 하는 나라가 한 여덟 개 정도 있어요. 부여라는 국호는 단군할아버지의 막내아들 ‘부여扶餘’에서 기원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단군조가 실제로 망한 것은 바로 44세 구물丘勿 단군 때 실제 쿠데타가 일어나가지고 거기서 역사가 완전히 다 무너졌어요. 그래서 삼한, 삼조선이 각각 병권을 가지면서 독립된 개별 국가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라 이름을 그때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습니다.
백제 26세 성왕聖王이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면서 나라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었습니다. 성왕 당시의 역사 경영과 국제정세를 알면, 대백제가 문화 융성의 극치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 느낄 수 있다고 봅니다.
단군조선은 진조선이 먼저 망하고, 번조선과 말조선(한반도)은 그대로 있었어요. 그런데 번조선 마지막 75세 준왕準王(기준)이 위만의 침략을 받아 왕검성에서 쫓겨나서 이 군산 어래산御來山으로 와서 익산益山 금마에서 조그만 나라를 열었습니다. 진조선보다 훨씬 후대에 망한 이 번조선의 준왕을 지금의 강단사학에서는 단군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보는 겁니다. 또 준왕의 본명이 기준箕準이니까 기자의 후손이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자조선이 일시에 있었다는 설은 윤내현 교수와 그 제자들이 주장하지만, 사실 번조선은 기자조선과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기자의 후손들 가운데서 69세부터 75세까지 몇 분의 왕이 나온 것입니다.
단군조선 말에 해모수가 만주를 차지하고서 북녘 북北 자를 놓아서 ‘북부여北夫餘’라 했습니다. 그것은 단군조선의 마지막 왕조 대부여를 계승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후 한나라 무제가 쳐들어오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나오는데, 이 동명왕이 고주몽으로 왜곡이 되어 있어요.
그러고서 북부여에서 ‘동부여東夫餘’가 나왔습니다. 동부여는 해부루解夫婁, 금와金蛙, 대소帶素로 이어지는데, 대소가 전쟁터에서 고구려 장수 괴유에게 단칼에 죽고서 동부여가 망했습니다. 대소의 아우가 ‘갈사부여曷思夫餘’를 만들고, 대소의 종제가 ‘연나부 부여椽那部夫餘’를 세웠어요. 연나부 부여는 저 위쪽에 있다가 왼쪽으로 가서 ‘서부여西夫餘’가 됩니다.
이 서부여의 마지막 왕이 의려依慮이고 그 아들이 의라依羅입니다. 그때 모용외慕容廆가 쳐들어와서 나라가 망하는데 서진西晉이 도와줘서 그 아들이 나라를 회복했어요. 그 전에 백제 고이왕古爾王이 요서지역을 점령했으므로, 모용외가 침략했을 당시 의려 왕을 탈출시켜 백제 땅에 있게 했다가, 일본에 보내어 오진(應神) 왕이 되게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일본 최초의 통일 왕조 야마토(大和) 정권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북방 기마민족이 내려와서 야마토 정권을 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서부여와 대륙 백제와 여기 본 백제가 연합해서 연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그 연대나 인물, 국제정세와 일치되는 총체적인 해석이 된다고 봅니다.
백제의 건국 과정
고구려 고주몽 성제의 아들 유리琉璃가 찾아와서 2세 유리명열제琉璃明烈帝가 됩니다. 유리가 동부여에서 찾아오자, 두 아들을 낳은 고주몽의 둘째 부인 소서노 입장에서 보면 미래가 불리하니까 아들을 데리고, 따로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곳이 패대浿帶 지역, 옛 대방帶方 땅이라 하는데, 대릉하와 난하 유역입니다. 그때 고주몽이 소서노에게 ‘어하라於瑕羅’라는 왕의 호칭을 내려주었어요.
여기서 초기 나라를 열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큰아들 비류沸流가 계승해서, 인천 미추홀 지금 문학산 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습해서 이쪽 하남 위지성慰支城으로 와서 서기전 18년에 백제를 세워 한성 백제 5백 년 역사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주장했습니다. 쓰다 소키치, 오타 료, 그리고 환국을 제거하여 우리 역사의 근원을 말살한 이마니시 류가 주장한 것인데, 백제는 4세기 중엽 이후인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5) 때 가서 왕국이 실제로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는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초기 기록, 1세에서 12세까지 백제 왕의 역사는 다 거짓말 역사라는 겁니다.
이러한 잘못된 고대사 인식이 이병도를 통해서 전수되어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8세 고이왕古爾王(234~286) 때 와서 백제가 나라 노릇을 했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설이 미국의 자연사 박물관 한국관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어이없게도 1600여 년 전부터 나라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백제·신라는 형제국
이 백제 건국의 이야기에서 결론은 무엇인가? 지금 한반도에서 남북분단의 대결구조, 영호남의 보이지 않는 갈등, 불신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고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북방의 고구려나 남쪽의 신라, 그리고 이 호남 백제는 다른 뿌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두막의 아들,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사위가 된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 고주몽은 북부여 시조의 5세손이므로, 혈통으로 보면 종통 적자입니다. 바로 그 고주몽의 친아들 온조가 내려와서 지금 서울 땅에다가 백제를 건국했습니다. 신라도 북부여 5세 고두막 단군의 외손자가 건국을 했어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는, 『환단고기』에 나와 있듯이 북부여를 계승한 고두막 단군의 따님의 아들입니다. 고두막한이 북부여 왕조를 위협해서 단군 자리를 빼앗아서 고두막 단군이 되었는데, 그 딸이 연애한 남자,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아마 북부여 왕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멀리 가장 남쪽 땅 경주로 왔고, 육촌장六村長 가운데 소벌도리蘇伐都利가 모신 것으로 봅니다.
이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는 북부여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 사회, 역사 속에 누적된 갈등의 모든 어둠을 아주 말끔하게 씻어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백제 역사의 대체적 흐름
백제의 역대 왕이 온조溫祚(재위, BC 57~AD 4)로부터 2세 다루왕多婁王(AD 28~ AD 77), 3세 고이왕古爾王(234~286)을 거쳐서 역사의 강건한 모습을 보인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5)으로 이어 왔는데요. 중국 동부의 옛 영토를 회복한 근초고왕은 평양에 쳐들어서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잡아서 살해해 버렸어요. 그렇게 고구려의 왕을 죽임으로써 극단의 대결구조를 이루어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쳐내려 왔을 때 21세 개로왕蓋鹵王(455~475)이 아차산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25세 무령왕武寧王(501~523)과 그 아들 성왕聖王(523~554), 그 다음에 마지막 의자왕義慈王(641~660)의 아버지 무왕武王(600~641)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공주에 가보면 25세 무령왕의 유물을 볼 수 있는데, 무령왕은 대왕, 천자라 그랬어요. 무령왕의 아버지가 24세 동성왕東城王(479∼501)인데 이 동성왕 살해사건이 대백제가 무너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어요. 그 다음 성왕을 거쳐서 동양에서 가장 큰 미륵불 사찰, 익산 미륵사를 지은 꿈이 마지막 의자왕에 와서 허망하게 무너집니다.
의자왕은 아버지를 잘 모시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아주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라를 쳐들어가서 642년에 경남 합천군에 있던 대야성大耶城의 성주인, 김춘추金春秋의 사위 김품석 부부를 죽였어요. 그래서 김춘추가 하루 종일 꺼이꺼이 울면서 ‘내가 반드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은 전생이 고구려의 신령한 점쟁이였다고 하는데, 고구려 왕비가 사통한 것을 점으로 은유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때 죽으면서 ‘내가 반드시 신라의 장군으로 태어나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천상에서 칠성별을 타서 여기에다 찍어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원한이 합작이 되어서 백제가 멸망당한 겁니다. 이 원한 관계에 의해서 결국은 신라가 당나라군을 끌어다가 멸망을 시켜 버려서 백제 역사가 허무하게 무너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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