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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탐험/우주섭리 개벽

<동학농민혁명>천하의 난을 동하게 한 동학혁명

by 이세덕 2023. 10. 27.

<동학농민혁명>천하의 난을 동하게 한 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천하의 난을 동하게 한 동학혁명

19세기 후반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쇄국鎖國 정책을 고수하였다. 하지만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면서 실각하였고,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를 위시한 조정 세력은 별다른 대책도 없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문호를 열어 버렸다. 조선은 이후 미국과 가장 먼저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후 다른 열강들과 연이어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왕조 말기의 무기력과 사회 전반에 걸친 부정부패, 그리고 비전 없는 외교 정책으로 조선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지배층은 외세에 빌붙어 정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하였고, 서구 열강에 이권을 빼앗기면서 국운이 심하게 기울고 있었다. 특히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대립은 전쟁 직전까지 치닫고 있었다.

1882년 임오년에 구식 군대의 차별로 인해 군란(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고, 1884년 갑신년에는 일본의 힘을 빌린 조선의 엘리트들에 의한 정변(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으나 청나라에 의해 진압되고 청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여기에 러시아가 조선에 입지를 넓혀 가자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영국이 1885년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 열강 따라잡기를 시도한 일본은 급격한 개혁으로 인해 발생한 불안한 국내 사정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은 위로부터의 혁명인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아래로부터 시작된 1894년 갑오 동학혁명이 일어나는 10여 년간 부국강병과 개혁을 위한 귀한 시간이 있었으나, 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1860년 상제님의 천명을 받아 창도된 동학東學이 민중의 삶 속에서 민족의 새로운 희망으로 세력화되고 있었다. 동학은 최제우 대신사가 처형된 이후 최시형을 중심으로 삼례 집회,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 보은 집회 등으로 교도들 사이의 동류 의식을 강화하였다. 이는 동학을 조직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1894년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동학 교도와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드디어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났다. 초기에는 기존의 민란과 같은 형태였지만, 이후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전명숙全明叔)을 중심으로 동학 접주들이 봉기하여 승승장구하였다. 태인 대접주 김개남金開南, 무장茂長 대접주 손화중孫華仲 등이 중심 인물로 고부 황토현*1)에서 전라감영군을, 장성 황룡촌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중앙군을 상대로 승리하였고,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1) 황토현 -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으로 상제님 탄강지와 가깝다.

당시 조선 정부의 대책은 한심했다. 자국에서 벌어진 사변을 외세인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이에 기회를 노린 일본도 텐진조약天津條約(1885)을 근거로 조선에 군대를 급파하였다. 이에 동학군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외국 군대 철병과 폐정 개혁을 요구하며 정부와 화약을 맺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군대를 철수하기는커녕 무력을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내정 개혁을 강행하였다. 이것이 근대적 개혁이라고 알려진 갑오개혁甲午改革이었다. 갑오개혁은 자주적인 측면은 있지만, 일본의 침략 의도가 반영된 타율적 측면의 개혁 성격이 더 강했다. 동학군은 다시 결집해 공주로 진격했지만,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이에 일본은 1894년 ‘조선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아산만에 정박한 청의 군함을 급습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우세한 전력을 바탕으로 청에 승리하였다. 이는 ‘중국 중심의 정치 질서’에 종지부를 찍고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뒤집어 놓았다. 이후 동아시아에서 촉발된 국제 정치 질서의 급변은 마침내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후천개벽의 개혁 정치를 외친 동학혁명은 세계 정치의 새 질서를 여는 근현대 역사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