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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는/증산도가 뭐예요?

<도운공사>욕심으로 인해 난법자가 된다.

by 이세덕 2019. 4. 25.

<도운공사>욕심으로 인해 난법자가 된다.
<도운공사>욕심으로 인해 난법자가 된다.

난법 지도자들의 핵심은 자신의 사욕을 위해 대의를 버리고 종통을 조작하고 뿌리를 부정하며 씨도둑을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자신이 잘났다는 자만감과 욕심이 종통과 정도를 부정하고 난법을 태동시키는 것이다. 왜곡된 판에 매 달려 있는 사람들은 참(眞)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전부 그 정신에 의해 얽히고 섥히고 세뇌되어 머릿속이 굴절되어 있다. 그 굴절 왜곡된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면 그 사람은 또 그 정신으로 앵무새 식으로 전하여 다른 사람에게 계속하여 세뇌시켜 기운을 갈먹게 하여 시대가 흐르면서 더욱 더 뿌리를 보지 못하도록 왜곡을 한다.

 

난법의 개창 초기로부터 수수십 년 내려오면서 왜곡되고, 그것이 신념화되어 점점 신비주의와 깊은 영적인 믿음의 확신에까지 이르기 때문에, 그런것이 마침내는 난법판에 매달린 사람들의 심령에 영적 현상(허령)으로까지 나타나게 된다. 앞서 언급한 그런 난법 신명들이 찾아와서 계시를 해준다. 바로 이 지경에까지 이르면 사제교리에 정신이 세뇌되고 자기도취까지 된 날조된 정신은 더욱 깊은 무덤을 팔 뿐이다. 상제님이나 거룩한 천신, 성령으로 위장하여 계시해 주는 한 맺힌 신명들의 감언이설은 삿된 난법자에게 자기 해원을 위해 딴 소리를 불어 넣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심판받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 난법 난도자의 문제가 바로 여기서 (천상의 영적神道차원에서 ) 생겨나는 것이다.

사회에 폐해를 주는 이런 난법판에 모인 사람들을 단순히 좋은 말로 교화해서 완전히 새 기운을 열고 구원의 새 바람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역사의 심판을 받아 정리될 뿐이다. 상제님은 참기운을 달리 묶기 위해 판을 가르신다. 상제님의 구원의 대업은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도자가 나와서 기운을 묶어 나간다. 예를 들어서 [갑]의 정신을 가진 지도자가 나오면 그런 정신에 묶이는 자가 포섭되어 난법의 한 집단을 이룬다. 또 [을]이 라는 지도자가 나오면 그 사람의 구미 에 맞는 사람을 운명적으로 만나, 거기에서 또 난법 [을]이라고 하는 판이 형성되는 것이다. 만약 대단히 과격하고 영웅심리도 아주 뛰어난 사람이 나왔다 하면 이런 인물은 자기 구미에 맞는 뱃심있는 인물을 만나서 그런 성격의 난법 판을 이룬다.

이렇게, 난법에서도 어떤 사람은 좀 도덕적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재주를 잘 부리고, 어떤 사람은 신비주의에 능수능란하여 말재주가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조직력이 강하다. 이와같이 난법 교주들이 하나의 판을 형성하는 데는 그들의 격(格)과 재능, 지식, 또는 선악의 기질과, 제 나름의 인생 경륜과 여러가지 심리적 요인이 개입된다. 마찬가지로 한 조직세계를 살펴보면 그 조직 최고 책임자의 정신구조와 기운을 읽을 수 있다. 증산도 도장에서 신앙을 해보면 우리 도장의 운명과 그 가능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도자가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을 통해서. 그런데 세속의 인간들은 진리를 찾을 때 그런 것을 구조적으로, 조직적으로 근본을 보고 잘 따지지 않는다. 어느 곳이 겉껍데기가 크고 근사한가 만을 본다. 내면세계를 볼 수 있는 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법은 참 신앙인으로, 참된 대도의 길로 나가는 과정이다. 인간이란 참을 지향하게 되어 있다. 죄를 지으면 항상 마음의 깊은 심연 속에서는 죄의식을 느낀다. 참되지 못함을 스스로 안다. 인간 음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우주의 신명이 자리잡고 있고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혀 못 느끼는 자들(남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자)이 역사의 이름으로 청소되어야 할 악질적인 난법 난도자들인 것이다.

 

인간은 참됨을 자기 스스로 확신할 때 삶의 보람을 느낀다. 고통에 대한 자기나름의 명분이 있으면 고난을 웃으면서 받는다. 죽음도 불사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에서 말하는 참법의 정신을 지키려는 순교자들이 걸어가는 영생의 길인 것이다. 의미있는 고난은 축복이다! 명심할지어다.

상제님께서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도통을 직접 전하여 종통을 확인해 주셨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 자기 중심으로 사물을 보는 삿된 정신 때문이다.

●상제님께서 매양 수부님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복동이로다. 장차 천하 사람의 두목이 되리니 속히 도통하리라.” 하시니라.(도전6:69)

증산도의 종통을 바로 보지 못하는 핵심 이유는 상제님의 도의 뿌리, [첫 씨앗]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자리에 해당 하는 인물을 보려면 상제님의 진리말씀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 난법 난도자들은 바로 이 자리에 해당하는 고수부님을 부정하거나 따돌리고 자신이 직접 계시받았다거나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종통을 전수받았다고 조작하여 자작극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제1변 도운시대 때 난법교단의 대부분이 상제님의 말씀이 책으로 나오기 이전[기사(己已, 1929)년 대순전경 초판 발행]에 개창되었기 때문에, 상제님이 과연 누구에게 종통을 전수했는가 하는 것을 상제님'말씀(道言)으로, 진리에 의한 체계적인 원리로 서로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문제로 도의 뿌리가, 즉 도사(道史)의 종통문제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난법판 개창자마다 자기가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도를 받아서 새 역사를 여는 진주라는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다. 판 개창에 대한 자존심이 나름대로 워낙 강하여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았고, 자기가 제 일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경쟁의식이 앞섰다. 

조철제도 맨 처음에는 종통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 상제님의 태모님과 성도들에게 찾아가 보더니 결국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욕심이 발동하여 종통역사관을 부정하고 자기식으로 독주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가 난법의 운명은 역사의 과도기, 발전과정이 아닌가! 이제는 상제님의 대도세계의 전략과 심법을 철저히 깨서 바르게 닦아야 할 때이다.

잘난 척 하면 안된다.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 겸손의 미덕으로 도심이 성숙한다. 앞 세상은 인간의 속을 다 들여다보는 세상이다. 겉과 속이 일체가 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속에 오물이 없도록 속을 잘 닦는 데(안개벽)에 총 주력해야 한다. 이것이 자신에 관한 가장 큰 문제거리다.

 

난법판에는 보편적, 객관적 진리체계가 없다.
난법판은 주로 신비주의, 꿈 이야기, 명당이론, 계시론, 불교, 유교 등 혼합주의(syncretism), 유물과 친서를 전수받았다는 이야기로. 일관되어 있다. 깨진자의 눈으로 보면 온갖 잡설로 꿰어맞춘 거짓을, 그들의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물론 난법교단 가운데는 진리를 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학술과 지식에 의한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배울만한 내용도 있다. 그리고 서로 겪은 정보를 제공해 주어 도운(道運)의 새 역사가 나올 수 있도록 후세에 발자취를 남김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나름대로 조금은 하는 것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문제가 있는 난법 지도자나 그를 추종하는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역사에 남기는 하나의 긍정적인 교훈의 자취는 분명히 있다.

 

인생은 선한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보다 난법자로부터 배우는 교훈과 깨달음이 어떤 면에서는 더욱 혁신적인 힘과 활력을 불어넣는다. 역사의 대광장에는 좌•우익의 대립에서 볼 때도 좌파 속에서 변혁의 힘이 더 강렬하게 나온다. 사람이 착하기만 해서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밥이다. 한주먹거리다. 어디에 내놓고 쓰지를 못한다. 사람이란 자고로 생사를 걸고 일할때는 옹골찬 맛이 있어야 한다.

 

●“마음은 성인의 바탕으로 닦고 일은 영웅의 도략을 취하라.(도전2:58)  

●잘못 닦은 자는 죽지는 아니하나 앉을 자리로 갈 때에 따라오지 못하고 엎어지며 자리가 없어 참석치도 못하리라.(도전7:89)

그러면 난법판의 특성을 정리해 본다.
첫째, 뿌리를 부정한다.
둘재, 사욕을 위해 종통을 조작하고 자기중심의 역사관을 만든다.
셋째, 보편적, 객관적 진리체계가 없다.
이들은 상제님의 일꾼이라 할 수 없이 다만 자신의 욕망을 해원하는 난법 해원판에 매달린 불나방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