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진리탐험/우주섭리 개벽

<천지공사>일본을 내세워 서양 제국주의를 물리치심 : 러일전쟁-동남풍공사

by 이세덕 2023. 11. 3.

<천지공사>일본을 내세워 서양 제국주의를 물리치심 : 러일전쟁-동남풍공사

<천지공사>일본을 내세워 서양 제국주의를 물리치심 : 러일전쟁-동남풍공사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신 20세기 초엽에는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약소국 침략이 절정에 이르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물론 태평양의 작은 섬까지도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고, 동북 간방의 조선도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꺾고 꺼져 가는 동방의 빛을 훗날 다시 밝히기 위해 일본日本이라는 나라를 일꾼으로 내세웠다.

상제님은 1903년 10월에, 친일파로 몰려 순검대에게 쫓기고 있던 김병욱 성도를 통해 애기판 씨름 공사(도전道典 5:50)를 보시어 공사公事와 사사私事가 함께 끌러지게 하셨다.

이 애기판에서 동양 제국주의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 러시아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판을 대하게 되었다. 본래 동양에 속했던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때 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가속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영토 확장과 함께 겨울철에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남하를 시작하였고, 인도印度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이를 저지한 대영제국 간에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 벌어졌다. 이 게임은 중앙아시아 내륙에서 충돌하다가 중국과 극동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막을 내렸다.

한편 메이지 유신으로 급격한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한 영국과 동맹을 맺어 극동에서 가장 우수한 해군력을 갖추게 되었다. 러시아는 영국과 영원한 맞수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이에 맞섰다. “두 신선은 판을 대하고 두 신선은 훈수를 한다.”는 상제님 말씀대로 오선위기 편 가르기가 시작된 것이다.

1895년 동학혁명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전쟁의 결과로 얻었던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삼국간섭三國干涉(러시아⋅독일⋅프랑스)에 의해 빼앗기자 절치부심 군국주의로 나아갔다.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를 드나들며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고, 상제님께서 일러전쟁을 붙인다(도전道典 5:50)고 하신 후로 약 1년 반 동안, 일본과 러시아는 또 다른 두 씨름꾼인 영국과 프랑스의 훈수를 받으면서 싸움을 벌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주인은 어느 편도 훈수할 수 없어 수수방관한다.’고 하신 말씀대로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때를 벼르던 일본은 1904년 2월 8일, 마침내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은 요동반도에 있는 여순항을 향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 진격해 결국 점령하였다. 여기에서 일본은 무조건 돌격하는 이른바 ‘반자이萬歲’ 돌격과 인명 경시의 전술을 내세웠다. 총병력 13만 명 중 절반 이상이 전사하였고, 장교는 10분의 1만 살아남았다. 이 외에도 한반도 전역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만주 등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정부는 동해에서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기 위해 울릉도와 독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였다. 1905년 2월 22일에 일본은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내용의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발표하였다. 울릉도에는 1904년 9월, 독도에는 1905년 8월에 망루를 세웠다. 이 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대한해협 전투의 마지막 추격전이 독도 인근에서 끝나게 되어, 독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러일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 싸움은 1905년 5월 27일 대한해협大韓海峽에서 전개된 쓰시마 해전으로, 일본 연합 함대와 세계 최강으로 불린 러시아 발틱 함대의 결전이었다. 영국의 방해로 세계의 절반을 돌아 9개월을 항해한 끝에 블라디보스토크항으로 들어가 정비할 틈도 없이 조선의 동해에 이른 발틱 함대는 일본 함대의 공격에 힘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해전의 완승으로 일본은 확고하게 제국주의帝國主義 열강의 반열에 올라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는 1945년까지 동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했다.*2)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한 러시아와 국력이 소진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어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매듭지었다. 당시 주일 미국 대사관 주재 무관이었던 아서 맥아더Arthur MacArthur는 러일전쟁을 참관한다. 이때 아들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1880~1964)를 부관으로 데리고 있었다. 바로 우리가 아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이다. 이렇게 장차 상씨름판의 훈수꾼이 될 미국이 애기판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2)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도 ‘무조건 돌격’을 외치다 무수한 사상자를 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전海戰의 흐름이 항공모함 위주의 전투였는데, 대형 전함 위주로 대응하다 패배했다.

일본인들은 대한해협 해전에서 천우신조로 불어온 동남풍(도전道典 5:53, 상제님께서 보신 ‘49일 동남풍 공사’)을 ‘가미가제神風’라 불렀다. 당시 연합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鄉平八郎 제독의 참모로 참여한 아끼야마秋山 중장(당시 중좌, 중령급)은 발틱 함대가 대한해협을 항진하는 장면을 영몽靈夢으로 두 번이나 자세히 계시받음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아사노 키즈지로淺野和三郞, 『동룡冬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