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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127

<한사군>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사군의 미스터리 현재 주류 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의 구도에 따라 평양 일대를 한사군 낙랑군 지역이라고 비정하지만 일제도 처음부터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통감부가 도쿄대 공대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게 평양의 석암동을 비롯한 전축분(벽돌무덤) 조사를 의뢰할 때만 해도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런 ‘고구려 유적’이 ‘한(漢) 낙랑군 유적’으로 바뀌게 된 데는 도쿄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역할이 컸다. 일제, 식민지성 강조하려한사군을 조선사 시작점으로 조작 중국 기록 미심쩍은데도실증사학 미명아래 한국사 정설로 도리이 류조는 만철(滿鐵)의 의뢰로 남만주 일.. 2020. 7. 7.
<환단고기>환단고기,우리역사의 진실 환단고기,우리역사의 진실환단고기,우리역사의 진실 일본이 무수히 많은 책자를 없애기 전까지만해도 우리 고유의 역사서들은 많이 볼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려 20만권이상을 일본이 소각해 버려서 지금 그런 사서들이 아주 귀하게 되어버렸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소장해오던 책이 전해진것이 있습니다. 북애노인의 규원사화, 계연수의 환단고기, 일연의 삼국유사, 고조선기 등이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이미 불교의 안목으로 윤색되어 시원역사의 전모를 제대로 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역사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내용이 남아 있기때문에 뿌리사를 찾는 소중한 자료라고 할수있겠습니다. 환단고기는 독립운동가 계연수가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이맥의 태백일사 등을 한권으로 엮어 .. 2020. 7. 6.
<환단고기>환단고기의 가치-환단고기 환단고기의 가치-환단고기단고기-환단고기-환단고기환단고기의 가치-환단고기 환단고기는 왜 읽어야 하는가첫째 『삼성기』의 첫 문장은“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되었다)”로 시작된다. 이것은 동서양 4대 문명권의 발원처가 되는 인류 창세문명의 주체를 밝힌 만고 명언이다. 그 주체란 바로‘ 오환건국’이라는 말에 나오는 환桓으로, 한민족의 시원조상인 환족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인류 문명은 환족이 세운 환국에서 비롯되었다.『환단고기』는 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삼성조三聖祖 시대로 묶어 전한다. 삼성조 시대는 환국(BCE 7197~BCE 3897)에서 배달(BCE 3897~BCE 2333)로, 배달에서 고조선(BCE 2333~BCE 238)으로 전개되었다. 이 7천 년 삼성조시대를 다.. 2020. 6. 25.
<환단고기>고대 한국문명의 이상,홍산문명 고대 한국문명의 이상,홍산문명 고대 한국문명의 이상,홍산문명 9천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 안경전 종도사님의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인류 정신사에서 볼 때 사실 근대사는 동방, 한반도에서 열렸습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東學운동 나아가 동학이 못다 이룬 사명을 완성해가는 참동학 운동이 그것입니다. 동학은 환국, 배달, 조선, 삼성조의 황금시절 문화를 이은 동북아 광명사상의 전통에 맥이 닿아 있습니다. 환국에서 오늘의 대한민국까지, 한민족의 9천년 역사는 한국 고대문명의 두 가지 핵심단어라 할 신교문화와 광명사상으로 일관된 것입니다. 신교사관, 대한사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는 점입니다. 대한사관은 역사 해석을 넘어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까지 밝혀주는 시각이요 인식의 새로운 틀.. 2019. 8. 20.
<환단고기>한국 고대문명의 세 왕조, 7천년 역사의 실체-홍산문명 한국 고대문명의 세 왕조, 7천년 역사의 실체-홍산문명 한국 고대문명의 세 왕조, 7천년 역사의 실체-홍산문명 9천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 안경전 종도사님의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 CNN 전직 기자 조 카포라렐로Joe Capolarello와의 인터뷰- ◎ 4대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전에 환국의 고대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는가? ▶고대 한국문명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것이 중국에서 발견된 홍산문화이다.[지도] 만리장성 밖에서 발굴된 홍산문화는 동북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문명으로서 황하문명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문명이다. 그래서 지난 백년 동안 발굴이 계속되어 온 이 홍산문화를 학계에서는 소위 ‘제5의 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몽고 유적지에서 .. 2019. 8. 19.
<경술국치>한일병탄조약-경술국치 한일병탄조약-경술국치 한일병탄조약-경술국치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 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이었나니 배은망덕背恩忘德은 신도神道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저희들에게 일시의 영유領有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하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도전 5편 118장)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을 잠시 다른 나라에 넘겨주고 천운天運을 기다리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이 다르므로 차별과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 없을 것이요 청국으로 넘기면 그 민중이 우둔하여 뒷감당을 못할 것이요 일본.. 2019. 8. 6.
<환단고기>9천년 한민족사는 신화가 아니라 현실 역사다!!! 9천년 한민족사는 신화가 아니라 현실 역사다!!! 9천년 한민족사는 신화가 아니라 현실 역사다!!! 안경전 종도사님의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 ‘단군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한 번, 꼼꼼히 새겨보자’는 생각으로 이번 대담의 질문들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단군’이라는 호칭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육당 최남선에 의하면 ‘단군’이란 말은 몽고어‘텡그리’에서 왔습니다. ‘천天’과 ‘무巫’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단군조선 때 단군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이끌어가는 왕이었고 동시에 온 국민을 이끌고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관장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단군조선의 초대 단군왕검은 운사雲師 배달신으로 하여금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을 비롯해 태백산 천황단, 지리산 노고단 등 지금도 남아 있.. 2019. 6. 28.
<대한만국 임시정부 수립>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이 때 상제님께서 여러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지방을 지키는 모든 신명을 서양으로 보내어 큰 전란戰亂을 일으키게 하였나니 이 뒤로는 외국 사람들이 주인 없는 빈집 드나들 듯하리라. 그러나 그 신명들이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오면 제 집 일은 제가 다시 주장하게 되리라.” 하시니라. (도전 5편 25장) 고종의 죽음과 3.1운동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 고종 태황제께서 승하하셨다. 고종은 상명지통喪明之痛(아들이 죽은 슬픔), 고분지통鼓盆之痛(.. 2019. 6. 26.
<볼셰비키 혁명>러시아 10월혁명 러시아 10월혁명 러시아 10월혁명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하루는 백남신과 함께 전주 남문 누각에 오르시어 글 한 장을 써서 불사르신 뒤에 한동안 누군가를 기다리시다가 다시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잠시 후 또 한 장의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옥골선풍의 한 아름다운 청년이 상제님 앞에 이르러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살려 주시기를 빌거늘 상제님께서 벼락같이 호통치시며 “한 번 부르면 올 것이지 어찌 세 번 만에 오느냐!” 하시고 붓에 먹을 묻혀 양미간에 점을 찍으시니 그 청년이 곧 물러가니라. 그 뒤에 김갑칠이 전주 서천교(西川橋) 다릿.. 2019. 6. 24.
<을미사변>을미사변,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을미사변,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을미사변,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을미사변(1895년)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이었나니 배은망덕(背恩忘德)은 신도(神道)에서 허락하지 않으므로 저희들에게 일시의 영유(領有)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하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도전 5편 118장 작전명 ‘여우사냥’이 시작됐다. 1895년 10월8일(음력 8월20일) 새벽 5시경 광화문 앞에 일단의 일본인 낭인浪人들이 일본군 수비대, 조선 훈련대와 함께 도착했다. 이들은 이미 새벽 3시경 공덕리孔德里의 별장(아소정我笑亭)에 유폐되어 있던 대원군을 강제로 끌어내어 궁으로 향했다. 대원군과 훈련대를 끌어들인 것은 향후 사건을 조선인들에 의한 반란으로 조작.. 2019. 6. 24.
<광개토대왕>광개토호태왕비의 비밀 광개토호태왕비의 비밀 광개토호태왕비의 비밀 호태왕비는 광개토호태열제의 사후 2년 만인 서기 414년에 그의 아들 장수열제가 세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금석문의 기록은 당대에 쓰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후세에 쓰인 사서보다 정확성이 높다고 본다. 호태왕비문도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는 정확성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 비문에 보면 광개토호태왕은 시조로부터 17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태왕은 고주몽으로부터 따지면 왕위로는 19대 왕이요, 혈통으로 따지면 13세손이 된다. 그런데 어째서 호태왕비에서는 17세손이라고 하였을까? 호태왕비가 발견되고 그것을 해독한 이후로 누구도 풀지 못하였던 이 미스터리가 『환단고기』를 통하여 풀렸다. 『환단고기』에서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단군으로 등극한 후 해모수.. 2019. 6. 18.
<고두막한>동명성왕 고주몽 동명성왕 고주몽 동명성왕 고주몽 고주몽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성왕 혹은 동명제라고 칭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런 설명이 없다. 왜 그런 칭호를 얻었는지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역사 왜곡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동명제는 원래 고두막한이다. 그가 스스로 ‘동명東明’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고두막한은 졸본 땅에 부여를 세운 다음 졸본부여라고 했고, 동명부여라고도 했다. 그래서 동명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부르게 되었는가? 좁게 보면 고두막한만이 동명왕이 되는 것이지만 넓게 본다면 고두막한을 이은 고무서 단군, 또 그 뒤를 이은 고주몽도 동명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모두 동명부여의 왕이기 때문이.. 2019.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