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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잊혀진 역사102

<홍산문명>홍산문명이 문자를 가졌다는 유물적 증거 홍산문명이 문자를 가졌다는 유물적 증거 홍산문명이 문자를 가졌다는 유물적 증거 [출처] 역사복원신문 2011-09-30 17:06 심제컬럼니스트 5,500년전(배달국)에 (녹도)문자가 있었다는 의 기록이 입증 ▲ 5500여년전에 홍산에서 발굴된 새모양 옥기에 양각된 부호문자. 이 부호 문자가 하남성 평정산시에서 발굴된 약 3,100년전 응국의 청동기 명문의 글자와 일치하며 갑골문자에도 포함되어 있다는것이다. 오른쪽의 맨위 글자는 白자로 밝음을 뜻하고 (학자확인) 다음 글자는 이을承 아래 글자는 마치 甘자와 유사하다. 소전이나 대전체는 현재의 한자의 뜻과 차이가 크다. 왼쪽의 글자는 무었일까? 마치 本자와 비슷해 보인다. 새의 날개에 새겨진 양각은 어떤 뜻일까? 중국대륙의 대부분의 지명이 한민족 언어적 원.. 2017. 10. 13.
<환구단>역사스페셜:대한제국 환구단 역사스페셜:대한제국 환구단 역사스페셜:대한제국 환구단 역사스페셜 - 대한제국 환구단 from dokdo in korea on Vimeo. >>무료 소책자 신청 클릭 2017. 10. 10.
<환단고기 단군세기>단군은 신화가 아니다.-단군조선 단군은 신화가 아니다.-단군조선 단군은 신화가 아니다.-단군조선 도대체 한민족의 역사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단군이 조선을 개국했다’고 막연히 알고 있다. 실제로 국사교과서에는 단군 이전에 있었던 환국, 배달국은 차치하고라도, 단군조선에 대해서도 모호하게 기록하였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BCE 2333)’ 라고 써놓아 문제가 된 적도 있다. 마치 남 얘기하듯 기술하며 사실상 고조선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에 이어 부여, 옥저, 동예 등을 잠시 언급한 뒤 바로 고구려로 넘어가는 등 고조선 2000년 역사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곧이어 “신석기 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BCE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이보.. 2017. 9. 29.
<환단고기>개천절과 환웅천황,단군왕검 개천절과 환웅천황,단군왕검 개천절과 환웅천황,단군왕검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개천이란 본디 환웅천왕께서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홍익인간·재세이화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 사건을 가리킨다. 개천開天(하늘이 열림)이라 함은 배달국을 건설한 사건을 표현한 것으로 민족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 한민족사는 실질적으로 신시神市 배달에서 시작 하므로 환웅천왕께서 신시를 여신 날을 개천절로 삼는 것이 옳다. 오늘날 대다수의 국민이 개천은 BCE 2333년 10월 3일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날은 실제로는 단군이 나라를 세운 날이다. 『단군세기』에는 “배달국 신시 개천 1565년(戊辰: BCE 2333) 10월[上月] 3일에 신인 왕검께서 오.. 2017. 9. 29.
<보천교>보천교 독립운동사 증언 (차경석 성도님 아들 차용남) 보천교 독립운동사 증언 (차경석 성도님 아들 차용남) 보천교 독립운동사 증언 (차경석 성도님 아들 차용남) 차경석은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신흥종교 보천교를 창건했다. 그리하여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고 일제의 탄압도 따랐다. 보천교에 대해 묻자, 용남(차경석 성도님의 아들 차용남)은 신중하면서 긴장하는 듯 했다. 그리고 용남의 달변과 조리있는 대답은 이러했다. "왜정 때, 자기(총독부)들이 발표한 것이 육백만입니다. 그때 우리나라 동포를 천 팔백만 인구라고 했지요. 교종이라고 교에서 종을 지은 것이 있어요. 종각이 있어서 삼시로 종을 치고 그랬는데, 그 종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컸어요. 그런데 경주 봉덕종이 크고, 서울 보신각에 종이 더 크다고 하지만은, 보천교 종은 우리나라 제일 큰 종인데, 저 산이 .. 2017. 9. 20.
<한글날>훈민정음-한글의 날,한글날 훈민정음-한글의 날,한글날 훈민정음-한글의 날,한글날 1926년 11월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주축으로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해 행사를 거행했고 1928년에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2, 1933년에는 양력 10월 29일에 행사를 치렀으며, 1934~45년에는 10월 28일에 행사를 치렀다.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의 말문에 적힌 날짜에 근거하여 1945년부터 한글날을 10월 9일로 확정했다. 이 날에는 세종문화상을 시상하고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을 참배하며 전국에서 학술대회 및 각종 백일장을 거행한다. 2005년에 국경일로 승격되었으며, 2012년 12월에는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개요 한국의 국경일. 매년 10월 9일이다. 한국의 문화유산인 한글을 제정 반.. 2017. 9. 13.
<환단고기>오성취루(五星聚婁)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였다. 오성취루(五星聚婁)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였다. 오성취루(五星聚婁)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였다. 오성취루(五星聚婁)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실린 단군세기와 단기고사 무진 50년(BC 1733년)에 오성(五星)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고 한 기록을 보고 서울대 천문학자 박창범 교수가 검증한 것을 말한다. 3700년 전에 수성(水星) 금성(金星) 화성(火星) 목성(木星) 토성(土星)등 다섯 행성이 루성(婁星) 쪽으로 모여 일직선상으로 나타나는 천문 현상을 말한다. 오성취루 현상은 사람의 육안으로도 관측할 수가 있고, 이런 천문현상은 250년마다 한번 정도 일어난다고 한다. 환단고기는 삼국유사나 제왕기처럼 한사람이 쓴 책은 아니다. 환단고기는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紀), .. 2017. 9. 1.
환국에서 뻗어나간 인류문명 환국에서 뻗어나간 인류문명 환국에서 뻗어나간 인류문명 환국시대 말년에 초대 환웅천황이 동방으로 이주하여 배달국을 건설할 때, 그 이전부터 동쪽으로 베링해협을 건너 이주한 무리가 아메리카의 인디언이 되고, 남아메리카에 간 무리들은 인디오가 되었다. 이것은 언어, 혈액형, 체질, 치아모양 등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이미 밝혀진 바이며, 미국의 고고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윷놀이, 실뜨기 같은 인디언과 인디오의 풍습, 유물만 봐도 우리와 유사한 것이 너무도 많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2환국의 한 갈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원지역인 티그리스 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수메르 문명을 열었다. 수메르 문명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크래머(Samuel N. Kramer)는 BC 3500년 전, 서.. 2017. 8. 31.
<환단고기>인류 역사의 뿌리 환국 인류 역사의 뿌리 환국 인류 역사의 뿌리 환국 한국의 역사는 상대(上代), 고대, 중세 또는 중고(中古), 근대, 현대로 크게 구분된다. 상대는 다시 삼성조시대(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와 열국시대(북부여, 삼한, 낙랑, 옥저 등)로 구분되고, 고대는 다시 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남북조(발해, 신라)시대로 구분된다. 고려·조선시대는 중세에 해당되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가 근대, 8.15해방 이후로 지금까지는 현대에 속한다. 이중 우리 역사의 뿌리에 해당하는 삼성조시대를 알아보자. 『환단고기』 「삼성기」 하편에 의하면 “옛날에 환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 되는 대제국으로서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나라를 이루고 있었고,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우루국, 수밀이.. 2017. 8. 31.
<배달국>한민족사의 첫 발자국, 배달 한민족사의 첫 발자국,배달 한민족사의 첫 발자국,배달 도가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환국 말기에 이르러 마지막 환인인 7대 지위리 환인께서 환국의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을 주고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제세핵랑군 3천명을 주어 동방으로 보냈다. 이에 환웅은 태백산(백두산) 아래(천평)에서 세계 최초의 도시 국가인 신시(神市)를 건설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로부터 배달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백두산의 박달나무 아래에서 제단을 만들고 천제를 올렸다. 배달국시대는 초대 거발환 환웅으로부터 18대 거불단 환웅까지, BC 3898~BC 2333년까지 1565년 동안 지속되었다. 흔히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 ‘배달겨레’ 라 부르는데, 이 배달의 유래가 여기에서 비롯 되었다. 이 배달환웅시대가.. 2017. 8. 30.
<부여>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부여사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후한서, 삼국지 등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사는 모두 서부여의 역사이다. 서부여는 동부여가 망한 후 요서에 생긴 망명부여로서, 서부여사는 부여의 끝자락 역사이다. 예를 들어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울구태蔚仇台, 간위거簡位居, 마여麻余, 의려依慮 등은 모두 서부여의 왕이다. 그런데도 강단사학계에서 나온 책과 논문들은 서부여를 부여의 원래 모습인 양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부여에 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는 중국 사서의 기록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부여의 원형이 처참히 파괴되고 한국사의 허리가 잘려 버렸다. 한국사의 국통 맥이 어지러워지고 뿌리 역사가 소멸되었다. 북부여라는 잃어버린 고리가 고조선과 고.. 2017. 8. 29.
<불가리아>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 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 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 강단 사학계는 부여 역사를 외면하지만, 부여사는 단재 신채호가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민족사의 골간을 이룬다. 몇 안 되는 부여사 연구가 중에 신용하 교수는, 부여가 최소한 BCE 5세기부터 CE 5세기까지 약 천여 년 동안 만주 일대에 존재하였으며 CE 4세기 전반까지 동북아의 최선진국이었다고 말한다. CE 5세기라면『 환단고기』가 전하는, 북부여에서 분파된 마지막 부여인 연나부부여(서부여)가 멸망한 때(494)와 일치한다. 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 말경 부여족의 일파가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지방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 5∼7세기 초까지 돈강 유역과 북캅카스 지역으로 계속 이주하였다. 7세기의 서양사.. 2017. 8. 28.